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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Feb 06. 2019

책이란 무엇인가

- 마감 중 만난 문장들

공방에 나무냄새가 가득하다. 곳곳에 쌓여 있는 목재들과 대패밥, 벽에 달라붙은 목재의 분진. 한 달 가까이 야근과 철야를 반복하고 있다. 이제 공방의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박제된 듯 정체되다 어느 순간 어리둥절할 정도로 응축되어 코앞에 다가선다. 검은 시계바늘 위의 시간은 기능을 잃고, 동료들의 얼굴에는 고된 노동으로 탈색된 표정들이 나무냄새 만큼이나 무겁다. 머리와 가슴이 텅 빈 상태로 마치 좀비처럼 일을 하지만, 또 그 한켠에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균형을 잃어버린 극단적인 공허와 충만이 비현실적인 상태를 만든다. 쉽게 쓰이고 버려질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가구 한 점에 서너 명의 삶이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종종 무색하게 느껴진다. 내가 만들고 있는 가구들이 과연 그런 가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물건일까.
가라앉은 몸 상태를 따라 이 모든 상황들이 몽롱하게 느껴질 때면 동료들 몰래 창고로 들어가 신발을 벗고 낡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붉은 장정의 아름다운 책 속에서 페터 춤토르가 말한다. “생각은 사물 속에 존재한다.” 그런 것일까. 그래서 나무를 자르고 깎으며 가구를 만드는 내내 어느 일상보다도 많은 상념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언제나 경이로운 건축물을 선보이는 건축가 페터 춤토르의 저 문장 하나가 생각에 가속도를 붙인다. 가구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18세까지 목수 도제과정을 거쳐서인지 그의 글에 쓰인 ‘건축/건물’이라는 단어를 ‘목가구’ 혹은 ‘물건’이라고 고쳐 읽어도 아무 걸림이 없다.
‘무엇이 좋은 가구인가’ 혹은 ‘어떻게 좋은 가구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늘 서성이고, 오늘처럼 목공이라는 버거운 노동의 한복판에 서 있을 때면 목수라는 직업 자체마저 회의를 느끼는 내게 1943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이 노건축가의 에세이는 때로는 거장의 조언으로, 때로는 지혜롭게 늙은 자의 위로로 읽힌다. 『페터 춤토르 건축을 생각하다』는 100여 쪽에 불과한 얇은 책이다. 한 시간 정도면 읽을 이 책을 나는 거의 보름 동안 읽고 있다. 모든 좋은 책들이 그렇듯 10분 전에 읽은 문장을 다시 읽어도 처음인 듯 새롭다. 91쪽에서 “어둠은 땅에 산다”라는 문장을 읽던 눈이 어느새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건물과 관련된 사물의 실체와 상상력 사이에 존재한다”라는 37쪽의 문장에 머물러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에 방향이 없다.
“무언가가 마음을 움직인다.” 건축가든 목수든 물건을 만드는 모든 이의 바람은 자신이 만든 물건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법칙 따위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과 절망을 느낀다. 거장 역시 예외는 아니다. “머릿속으로 건축을 떠올리다 보면 종종 숨 막힐 듯 공허한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만 생각나거나 아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은 두 번째 장인 ‘아름다움의 핵심’이다. 1991년 12월, 슬로베니아 피란 심포지엄의 강연을 정리한 이 장에서 페터 춤토르는 작가 페터 한트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의 핵심에 대해 말한다. “아름다움은 어떠한 상징이나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 원시 상태의 자연 안에 존재한다.” 현대의 예술은 ‘메타포’를 전제조건으로 존재한다. 페터 춤토르는 건축 혹은 물건에 대한 메타포의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나아간다.
“나는 건축을 메시지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세기의 예술과 건축이 지향했던 것, 추구했던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이다. 이제 그는 이 선언을 점점 구체적으로 자신의 작업에 적용한다. “건축은 그 본질과 무관한 대상을 위한 수단이나 상징이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들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곳에 존재한다.” “감정을 건물과 혼합하려고 하지 말고 감정 그대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건물은 무언가를 나타내거나 대표하지 않고 건물 자체로존재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깊이 깨달은 장인의 마음으로 단순성과 실용성을 형태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페터 춤토르 건축을 생각하다』, 페터 춤토르 지음, 장택수 옮김,박창현 감수, 나무생각, 2013



매호 반가운 김윤관 목수의 리뷰. <기획회의 481호>(2019년 2월 5일 발행)에서는 『페터 춤토르 건축을 생각하다』를 다뤄주셨다(「노건축가가 전하는 아름다움의 핵심」). 내가 만드는 책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보게 만드신 문장들. 감사합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일이 너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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