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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Feb 15. 2019

주인공을 정말 죽일 거요?

- 마감 중 만난 문장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고 그럼에도 견뎌야 하는 시간들을 자신의 인생에서 치워버렸다. 원고의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과감한 편집력을 원고가 아니라 자기 인생에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무언지 몰랐던 커다란 결여의 실체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책이 출고되어 릴리스를 마친 날에야 책의 핵심을 드러낼 카피 헤드라인이 생각난 편집자의 얼굴이 그처럼 난망할까.



주인공을 죽일 거냐고 왜 죽어야 하냐고 레너드가 조심스레 묻는다. 생각에 잠겨 있던 버지니아가 대답한다. 시인과 그의 환상이 죽는다고. 왜 꼭 죽어야 하냐고 다시 묻자 버지니아가 대답한다. “누군가는 죽어야 남은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어요(Someone has to die that the rest of us should value life more).” 그 순간 죽음이 결정됐다.



편집자 레너드는 그렇게 아내이자 작가의 마음을 열고 그녀 혼자 하던 고민 속으로 들어가 중요한 대목을 함께 썼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한 채로 아무도 모르는 고통 속에서 혼자 괴로워하며 그것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인의 삶은 버지니아의 소설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과거의 시간을 맴돌며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덮어둔 채 의뭉스런 현재를 간신히 견디고 살아가는 댈러웨이 부인의 껍데기를 과감히 벗어버렸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온 그 사람에게 이제 자기 삶을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 삶의 이유를 의지해온 이에게 자기 삶을 찾아갈 용기를 주기 위해서. 타인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죽이는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이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일어난 새로운 질문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문학이 죽고 책이 죽고 작가와 편집자가 다 사라진다 해도 독자는 끝내 살아남는다는 것을.




편집후기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482호(2019년 2월 20일 발행) 연재 '에디터 인 필름'을 편집하다 필자에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선생님, 매번 이런 말씀 드려 진정성을 의심하실 것 같아 걱정되지만 이번 원고 정말 좋네요. 마지막 문단은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라 눈물 흘리며 읽었습니다. 엉엉 울고 싶은데 회사라 숨죽이고 울 수밖에 없네요. 이번 원고는 특히 선생님의 비유가 백미인 것 같아요. 일로서의 편집과 삶에서 발휘되는 편집력, 릴리즈, 헤드카피 등 선생님의 비유가 삶과 죽음, 작가와 편집자 사이를 넘나드네요. 좋은 원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푹 쉬셔요.



<디 아워스>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너무 좋아 세 번을 다시 봤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고 보면 볼수록 잔상이 남는 영화다. 특히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는 잊히지 않는다. 최근에 도리스 레싱의 책 『19호실로 가다』와 『사랑하는 습관』(이상 문예출판사)을 읽었다. 특히 「19호실로 가다」는 읽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내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고 있다. 그 여운이 <디 아워스>와 이하영 북칼럼니스트의 「주인공을 정말 죽일 거요?」와 만나 여성의 생 전반을 돌아보게 했다. 자연히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랐고 엄마에 대해 매일 돌아보는 한 주를 보내고 있다.


<디 아워스The Hours>,   스티븐 달드리 감독, 2002


돌아가시기 직전의 엄마는 마치 외부인처럼 엄마 외의 가족과 집과 엄마의 방을 관찰했다. 엄마는 늘 두 딸이 자유롭게 살길 원했고 그렇게 딸들을 키워냈는데, 병든 자신의 육신이 딸들에게 피해를 끼칠 것을 강박적으로 두려워했다. 최근에 만난 필자님은 어떤 책은 나의 생각을 정리한 것처럼 느껴져 책 읽는 게 좋다고 하셨다. 나도 '에디터 인 필름' 4회 원고를 편집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이 지금까지 엄마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두 딸들이 이제 자기 삶을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 삶의 이유를 의지해온 두 딸이 자기들 삶을 찾아갈 용기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라서, 엄마 스스로를 죽이는 용기를 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죽어야 남은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고선 엄마의 죽음을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것을 가진 그녀가 왜?"라는 도리스 레싱의 물음은 엄마의 죽음에도 유효하다. 때로 사람들은 하디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수 브라이드헤드처럼 살아가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의 말처럼 "우리는 이런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는 이유를 생각만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스스로 묵혀두었던 이 생각을 이하영 칼럼니스트의 원고를 편집하고 나서야 비로소 동생과 나눌 수 있었다. 엄마는 엄마만의 방을 찾아 떠난 걸까?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나는 엄마를 응원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엄마에 대한 긴 책을 쓸 것이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기에. 동생과 나, 우리 둘의 최고의 엄마로. 다시 태어나도 나는 엄마의 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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