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용서되는 일요일

by 김뭉치

갑자기 할머니가 되었다. 피부엔 주름들이 깊게 새겨졌고 손마디는 거칠었다. 방바닥에 누워서 자는데 먼저 간 영감이 귀신이 되어 속삭였다. 할멈, 우리 애 한 명 더 낳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자식이라면 이미 셋이나 있는데 뭣하러 한 명 더 낳아 사서 고생 한단 말인가.


장면은 바뀌어 사위가 어둑한 밤, 흙길로 된 오르막을 할멈이 된 내가 어렵게 어렵게 오르고 있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다 문득 공기가 풀리며 풀잎들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넷째가 도망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위험하다고 느낀 순간, 선득해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놀라서 깨어나니 꿈이었다. 남편이 왜 이렇게 잠을 못 이루고 힘들어 하냐고 물었다. 악몽을 꿨어. 남편이 꿈 이 야기를 해 보라고 했다. 악몽을 꿨는데 얘기를 하라니. 그러나 지금 말을 하지 않으면 꿈이 또 휘발될 것 같아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꿈 속에서 내가 할머니가 된 거야.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고 미래의 내 모습도 아닌 처음 보는 할머니가 된 거야. 꿈 속의 할머니인 내가 자고 있는데 먼저 간 영감이 귀신이 됐는지 옆에서 자꾸 속삭여. 자식 한 명 더 낳자고. 싫다고 싫다고 하는데... 무서운 걸 간신히 참고 한참 얘기하는데 남편은 대답이 없다. 잠들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 남은 무서워 죽겠는데 잘도 잠을 자는 구나. 그래서 남편이구나, 하는데 내 웃음소리에 놀란 남편이 다시 일어나 졸린 목소리로 그래서, 묻는다. 꿈 때문에 무섭다가도 남편 때문에 웃는다.


그 뒤로 남편으로 인한 웃음 퍼레이드는 계속됐다. 악몽 때문에 새벽 세 시 반에 깬 나는 그 뒤로 영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다시 잠들면 또 악몽에 시달릴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웹 서핑을 하고 있었는데 화면 밝기 때문에 깼을까. 다시 일어난 남편이 졸린 목소리로 어떻게 된 사람이 잠을 한 시간도 안 자냐고 묻는다. 악몽을 꿀까 봐 못 자겠다고 했더니 뜬금없이 옷이 해질까 봐 옷을 안 입는 사람이랑 뭐가 다르냐며, 본인이 있으니 얼른 자라고 한다. 본인은 옆에서 잠만 잘 자서 악몽의 고충 따윈 모르지 않냐고 했더니 자기도 방금 꿈을 꿨다고 한다. 나도 힘들어. 그러면서 나와 계속 이동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긴 여정이었어.


혼곤한 목소리로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남편을 보니 맥락없이 그만 웃음이 나서 둘이서 끌어안고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이 그친 뒤 남편은 잠들었고, 나는 한참을 뒤척이다 아침 해가 밝아올 무렵 잠들 수 있었다. 그래도 남편이 있어서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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