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이번 명절엔, 시댁에 안 가기로 했다

- 스트레스 없는 설 연휴를 위하여

by 김뭉치

이번 명절엔, 시댁에 안 가기로 했다. 아니, 못 가게 됐다. 시엄마가 한사코 오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냥 하시는 말씀이시겠지, 맘에 없는 소리시겠지 했는데 너무 강경히 오지 말라고 하셔서 나중엔 좀 서운해지려던 참이었다. 아니, 가서 자고 오는 것도 아니고 밥 먹고 차만 마시고 돌아가는데 그마저도 민폐였나, 되짚어 보게 됐다. 시댁에 가면 늘 시엄마가 요릴 하시는데 혹시 늘 따순 밥 얻어만 먹고 설거지도 안 하고 돌아오니 우리 부부가 가면 오히려 더 힘드셔서 그런가, 생각도 해 봤다.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다 급기야 남편에게 전화를 드려 보라 했다. 무조건 우리는 간다고 말이다. 내심 남편이 이기겠지, 했는데 남편은 패배자가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약속이 있으시다 했다. 내 생각엔 없는 약속까지 일부러 만들어 우릴 못 오게 하시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다시 한번 어머니와의 통화를 시도했다. 어머니는 제발 빨간 날만이라도 친정에 가서 친정 식구들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일한다고 친정에 자주 가지도 못하는데 연휴 하루라도 더 아껴서 친정에 가라는 거다. 우리 어머니가 멋진 분이라는 건 진즉에 알았지만 새삼 더 감동이었다. 이번 명절은 또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우리 어머니가 예외적인 분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어머니가 참 좋다


어머니 연세가 올해 68세다. 칠순이 되어 가시지만 외모도, 마인드도 젊고 합리적이고 우아하다. 나는 어머니가 참 좋다. 나도 우리 시엄마처럼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다. 내가 말하는 우아함이란 단지 외모의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 상식 이하의 행동은 하지 않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는 것, 설사 그게 나보다 더 어리고 약한 사람들이라 해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우아함이란 그런 거다. 그래서 난 우아한 우리 어머니를 존경한다.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그냥 넘기면 안 될 듯싶었다. 친정아버지도 매번 명절 때마다 친정에 먼저 보내주시더니 이젠 아예 설 연휴 내내 친정에서만 보내고 오라는 시어머니가 어디 계시냐며 꼭 더 잘해드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한 번도 엄마에게 그런 소릴 하신 적 없는 듯하다. 엄마는 그 집 사람들 중에서도 늘 가장 마지막에 할머니댁을 나서는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외가댁에 가 본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다. 새삼 엄마가 불쌍하고 아빠랑 할머니가 원망스러워졌다. 대체 왜 그래야 했던 걸까.


새삼 엄마가 불쌍하고 아빠랑 할머니가 원망스러워졌다. 대체 왜 그래야 했던 걸까


연휴 전 어머니께 점심이라도 한 끼 사 드리고 싶어 연락을 드렸더니 한사코 거절하신다. 더 이상 나도 질 수 없어 계속 졸라대자 어머니께서는 시어머니랑 밥 먹다 체할지 모르니 밥은 혼자 편하게 먹으라며 그럼 간단하게 커피나 한잔 마시고 헤어지자 하신다. 그것도 내가 시댁까지 오기 힘드니 어머니께서 서울로 올라온다 하신다. 결국 어머니는 서울로 오셨고 카페에서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담소를 나눴다. 하루라도 뭉치 짓을 안 하면 안 되는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머니께 커피를 쏟았는데, 어머니는 웃으시며 내가 어머니를 어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인자하게 말씀하셨다(사실 나는 어머니가 어려워서 커피를 쏟은 게 아니라 배가 고파 손이 떨려서 그랬던 거였다!).


카페에서 어머니는 친정 식구들 줄 선물들과 내 친구에게 주고 싶다며 직접 말리신 사과말랭이 봉지들을 주섬주섬 꺼내셨다. 어머니는 수줍으신 듯, 쑥스러우신 듯 내 이름을 부르시며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신 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쁘고 고운 것, 맛있는 걸 보면 늘 내 생각부터 먼저 나신다며 어머니는 설 선물이라고 버버리 디링백을 건네셨다. 지난번에도 대학원 입학을 축하한다며 명품백을 주신 터라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 매번 설 때마다 선물을 주시면 어떡해요. 작년 설에도 용돈을 백만 원이나 주셨잖아요." 조심스레 말씀드리니 돈 주면 내가 안 쓸까 봐 이번엔 특별히 가방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갑자기 아무것도 준비 못한 내가 초라해졌다.


(좌) 시엄마가 설 선물로 주신 버버리 디링백 (우) 대학원 입학 축하 선물로 주신 코치백과 지방시 립밤, 로라메르시에 캐비어스틱, 목걸이


어머니는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으라며 결국 진지도 잡수시지 않고 돌아가셨다. 오늘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다며 되레 사과의 카톡을 보내신 시엄마. 자꾸 이러시면 명절이 더 좋아지는데…. 안 그래도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버버리 시계를 선물해준 터라 어머니가 주신 가방과 함께 두니 세트처럼 잘 어울렸다. '팔자에 없는 명품들이 턱 하니 생겨 버렸네.' 문득 남편보다 어머니가 날 더 사랑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엄마 편찮으실 때 엄마 드시라고 사골국을 끓여 보내신 정성을 생각하니 남편도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진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좌)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버버리 시계 (우) 시엄마가 주신 버버리 디링백과 남편이 준 시계. 세트처럼 잘 어울린다


시대가 점점 바뀌고 있다. 예전엔 연휴에 시댁부터 가는 게 당연했을지 몰라도 이젠 아닌 듯하다. 게다가 올해 설처럼 앞이 길고 뒤가 짧은, 애매한 명절 연휴엔 더 그렇다. 모두가 즐기는 명절이 되려면 좀 더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집안의 어른이 본을 보여주면 더욱 좋겠다. 우아한 어른과 스트레스 없는 명절은 그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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