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장소는 너의 이름이다
내가 여섯 살에서 여덟 살 무렵, 우리가 살던 동네를 아빠는 잊지 못한다. 아빠는 그곳에서 가장 추억이 많았다고 한다. 온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지냈고 각자의 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알던 시절이었다. 땡볕 여름이면 집집마다 문을 열어놓고 등목을 하고 달그락달그락 밥 먹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지금도 때때로 그 동네에 들르곤 한다. 호젓한 기분에 취해 가끔은 나와 신랑을 데리고 그 동네 탐방에 나선다. 동네는 20여 년 전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가 살던 집터도 사라지고 없다. 엄마에게 용돈을 받으면 동생과 앞다투어 달려가던 구멍가게도, 무서워 도망 다녔던 주인집 할머니의 불도그도 이젠 없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엄마가 건져 올리던 그물 사이로 튀기던 은빛 햇살에 눈을 찡그렸는데, 나의 눈을 부시게 했던 엄마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491호 신정아 교수의 '뉴미디어와 콘텐츠 기획'은 장소에 대해 다룬다. '모든 장소는 너의 이름'이라며 신 교수는 장소가 어떻게 콘텐츠가 되는지에 대해 살뜰하게 살핀다. 아래 문단을 마주한 채 한참을 옛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라진 동네들에 대해 생각했다. 익명성이 좋아 도시로 왔지만 때때로 나의 유년기에 깊게 배어 있는 향로동의 바다 냄새를 기억한다. 모두가 가난했으나 뺨을 스치던 바람은 그리 차지 않았던 그 시절, 내게도 역시 홈 파인 레코드처럼 기억되는 공간. 이 글을 쓰며 감히, 당신에게 소중한 장소는 어디인지 묻는다. 만일 당신에게도 소중한 어떤 장소가 있다면 그 장소에 설탕처럼 달콤하게 녹아 있는 추억들이 아마 지금쯤 당신에게 와락 안길 것이다.
로컬콘텐츠는 동네 특유의 곡선과 진동에 공명하는 작업이다. 사람들의 무수한 발자국으로 다져진 골목들과 담벼락의 낙서들, 가로등 불빛 아래 설렘과 취한 아버지의 흥얼거림이 고스란히 저장된 홈 파인 레코드 같은 공간들. 로컬콘텐츠 기획은 장소를 거쳐 간 무수한 이름들을 호명하는 것이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먹고, 마시며 생의 한 조각을 나누어가진 얼굴들을 추억하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가 되고, 타인이 이웃이 되며, 낯선 공간이 친근한 장소가 되는 문화적 행위와 소통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장소들이 오래오래 거기 남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하여 로컬콘텐츠 기획의 진정한 출발점은 자신에게 소중한 장소가 어디이며, 그곳에 함께했던 이들은 누구였는지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돌아보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신정아 방송작가·한신대 인문콘텐츠학부 강의초빙교수 , 「장소는 어떻게 콘텐츠가 될까?」, <기획회의> 491호 '뉴미디어와 콘텐츠 기획 05', 2019년 7월 5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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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