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있잖아요, 박 사장의 손가락이 탁자를 살짝 어루만진다. 낡은 건물이나 가구 같은 걸 해체할 때 나오는 오래된 목재로 만든 거예요. 긴 시간 건조되어서 단단하고 색과 결이 자연스러워요. 탁자 위로 떨어지는 햇살도 달라 보이잖아요? 세월이 자기 색과 결을 찾아준 나무들이지요. 여기 탁자들은 일부러 이런 나무들로 만들었어요.
- 부희령, 「박 사장이 팔아야 했던 것」, 1부 길 위에서, 『무정에세이』, 사월의책, p. 21-
인생은 시간이 아니라 깊이의 문제다
- 부희령, 「별보배고둥」, 2부 여행의 이유, 『무정에세이』, 사월의책, p.124
처음 시골에 내려가서 살 결심을 했을 때는 사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서 먹고살 계획이었다. 벌써 십오륙년 전 일이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으므로, 나무를 심고 키우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면서 대책 없는 몽상에 빠져 있었다. (중략)
막상 귀농이라는 것을 해보니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정신의 노동을 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중략) 게다가 낮에 농사일을 하고 나면 저녁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도 먹고살 만큼 돈을 벌 수 없었다는 것. 오죽하면 농사지을 때 들어가는 비용을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만 챙기는 게 더 이익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을까.
- 부희령, 「귀농 실패기」, 4부 세상에 없는 집, 『무정에세이』, 사월의책, pp. 199-200
“할머니, 들어와서 좀 앉아 있다 가요.”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정육점 청년이 가게 밖에서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서성이는 할머니를 부른다. “나 고기 안 살 거야.” “글세, 괜찮으니까 여기 의자에 와서 좀 앉아 있어 봐요.” 청년이 성화를 한다. “왜?” “가게 안에 손님이 있어야 그걸 보고 다른 손님이 들어온다니까. 할머니 다리 아프지 않아요? 여기서 쉬었다 가요.” ‘찌개용 돼지고기 3근 만원’이라는 푯말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할머니 대신 나를 붙잡고 가게에 앉았다 가라고 할까 봐.
시장에 갔다. 슈퍼도 아니고 마트도 아니고 시장. 골목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마다 주인이 다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성가시게 불러 세우는 곳. 참기름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뒤섞이듯, 걷다보면 반드시 골목 두 개가 만나는 교차로가 나오는 곳.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무엇을 사러 왔는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곳. “이거 나한테 어울려요?” 손수레에 잔뜩 쌓여 있는 옷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티셔츠를 몸에 대보며 나에게 묻는다. 내가 얼른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다른 손님의 물건을 비닐봉지에 넣어 주던 주인아저씨가 소리친다. “아, 그런 건 남자에게 물어봐야지! 예뻐요, 예뻐. 뭘 입어도 예쁘겠구먼!”
결국 만원에 세 근인 돼지고기를 사가지고 돌아 나오면서, 아마도 시장이란 처음에는 심심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모여드는 장소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곳에 모여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일들을 이야기했을 것이고, 처음 본 여자와 남자가 눈길을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자 키우고 재배한 동식물이나 직접 만든 물건들을 서로 자랑하고 구경했을 것이고 필요한 물건들을 맞바꾸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장의 기원은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물론 다를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시장은 이제 그런 곳이 아니다. 오늘날의 시장은 수요와 공급과 가격이 거론되고, ‘좋다, 나쁘다, 불안하다, 상당히 긍정적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등등으로 묘사되는, 심지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이다. 장사하다가 말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리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시장은 이제 시장이라기보다는 보존해야 할 과거의 유적지 혹은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를 만들어준 세상 하나가 사라져가고 있다.(2016)
- 부희령, 「시장의 기원」, 4부 세상에 없는 집, 『무정에세이』, 사월의책, pp.235-238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햇빛과 바람의 냄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고 바람이 드나드는 베란다에 빨래를 널 수 있어 경험하게 되는 작은 감동이다.
어쨌든 누구도 다른 사람의 복합적이고 미세한 불편이나 그것에서 비롯된 경험들을 ‘가난’이나 ‘거지’라는 말로 납작하게 규정할 자격은 없다. 안전하고 청결한 환경을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칠 자격도, 목적이 모호한 동정과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자격도 없다.
(중략)
다른 사람을 가난뱅이나 거지라고 멸시할 힘이 있다면, 우선 햇빛과 바람만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스스로 애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 당신이라면, 나는 굳이 이유를 말해 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2019)
- 부희령, 「당신의 플란넬 셔츠」, 4부 세상에 없는 집, 『무정에세이』, 사월의책, pp.242
치료약이 있다면, 지리멸렬할 줄 알았으나 뜻하지 않게 함박눈이 쏟아진 크리스마스에 받은 선물 같은 선의일 것이다. 내가 당신의 가족이고 친구이고 직장동료라서 얻을 수 있는 이득 말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호의나 회계장부 속에 기록해 둘 친절 말고. 이따금 나의 깔끔한 합리성을 무너뜨리고 싶다. 타인의 작은 허물에 눈 감는 어수룩함. 살다보면 어느 정도 손해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 햇빛이나 바람처럼 목적 없이 흩어지고 퍼져나가는 선량함. 그런 마음들 없이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2015)
- 부희령, 「혐오 바이러스」, 5부 우리들의 안녕, 『무정에세이』, 사월의책, p.258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슬픔도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좌절도 느끼지 않는 걸까. 오래 품어 온 사랑을 거절당해도, 취직 시험에 연거푸 떨어져도, 난데없이 뺨을 맞듯 직장에서 해고를 당해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준비된 대본을 읽듯 쉽게 말한다. 울지 마라. 징징거리지 마라. 정신력으로 극복해라. 하지만 그 모든 감정들을 마비시키고 난 뒤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감정은 편리하게 칸막이가 나뉘어 있는 게 아니다. 감수성은 말처럼 쉽게 선택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흔히 부정적이라고 일컫는 감정을 둔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소한 기쁨이나 틈틈이 행복을 느끼는 능력, 연민하고 공감하는 능력도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슬픔을 경멸하고 아픔을 회피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 타인을 위해 울지 못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쉽게 허용되고 가장 자주 표출되는 감정은 분노와 혐오다. 단단한 굳은살 아래,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켜켜이 쌓여있을 게 틀림없는 아픔과 괴로움 때문에 우리는 잔인하게 타인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로 강한 것일까.
이제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은 바뀌었다. 두려움이 씻겨나가도록 아이가 실컷 울기를, 그래서 이 세상에 갓 태어났을 때처럼 연약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그 몸으로 다시 한 번 봄 햇살 속으로 반짝이며 튀어오르기를, 나는 바랐다.(2018)
- 부희령, 「상처받는 능력」, 5부 우리들의 안녕, 『무정에세이』, 사월의책, pp. 28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