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by 김뭉치
호손은 멜빌의 검소한 습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멜빌은 언제나 깔끔했다. 짐이라고 해야 달랑 낡은 가방 하나였고, 그 안에는 바지, 붉은색 셔츠, 칫솔, 머리빗이 담겨 있었다. 여러 번의 선원 생활 때문에 이런 검소함이 몸에 배었다. 망각과 버림이 그의 마지막 운명이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삶의 불행과 고독을 관통하는 독특한 상상력」 중에서, 『필경사 바틀비』 ,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27


살아가면서 기이한 우연들을 많이 보아 왔지만 터키가 붉은 얼굴로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가장 빛나 보이는 그 순간은, 스물네 시간 가운데 그의 업무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순간이었고, 그 중요한 순간이 매일 정확하게 반복된다는 사실 역시 희한한 일이었다. 그 시간에 그가 완전히 나태하게 군다거나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제는 그가 지나치게 원기 왕성해진다는 데 있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흥분해서 들썩거리며 경솔하고 무모하게 움직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펜을 잉크병에 담그면서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곤 했다. 내 서류에 그가 남긴 잉크 얼룩은 전부 정오 이후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오후가 되면 아무렇게나 움직이면서 슬프게도 잉크 얼룩을 남길 뿐만 아니라 어떤 날은 시끄럽게 굴기까지 했다. 그럴 때에는 그의 얼굴 역시 무연탄 위에서 밝은 불꽃을 내며 타는 착화탄을 무더기로 올려놓은 것처럼 시뻘겋게 타오르는 것이 장관이었다. 그는 의자로 삐거덕거리는 불쾌한 소음을 내기도 하고, 잉크를 말리려고 뿌리는 모래를 담아 둔 통을 엎지르기도 하고, 펜을 고치다가 조바심을 내면서 산산조각으로 쪼개 놓고 벌컥 화를 내면서 그 잔해를 바닥에 내던져 버리기도 했다. 벌떡 일어나 책상 위로 몸을 구부리고 서류들을 정말 아무렇게나 상자에 집어넣기도 했는데 그처럼 나이가 지긋한 사람의 행동으로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 pp. 23-24

"전부 맥주 덕이죠.“ 터키가 외쳤다. ”쩜잖은 것은 맥주의 효과랍니다. 니퍼즈랑 오늘 식사를 함께 했거든요. 변호사님, 제가 얼마나 점잖은지도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서 그의 눈을 멍들게 해도 될까요?“
- p. 43

나는 자리에 앉아 다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심사숙고했다. 그의 행동에 굴욕을 느꼈고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그를 해고하기로 결심했으면서도 이상하게 미신적인 무언가가 심장을 두드려 내 뜻대로 하지 못하게 했고, 가장 고독한 이 인간에게 쓴 말을 한마디라도 내뱉는다면 나를 악당이라고 비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 54

우수에 젖어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 허영심이 동정심을 이겼다. 바틀비를 없애는 문제를 능란하게 잘 처리한 자신에게 득의만만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정한 사색가라면 누구라도 내 대처를 능란하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택한 방법의 장점은 완벽한 평화로움에 있었따. 천박하게 윽박지르지도, 어떤 식으로든 허세를 부리지도, 성마르게 호통을 치지도, 방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바틀비에게 거지 같은 짐 보따리를 꾸려서 꺼지라고 사납게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바틀비에게 떠나라고 시끄럽게 명령하지 않고 - 재주가 부족한 사람이라면 그랬겠지만 - 나는 그가 떠나야 하는 근거를 토대로 내가 해야 할 말을 쌓아 올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내가 택한 방법에 매료되었다.
- pp. 61-62

소문은 이렇다. 바틀비는 워싱턴에서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이었다가 갑자기 행정부가 바뀌어 해고되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떠올릴 때 나를 사로잡는 감정을 나는 적당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배달 불능 우편물이라니! 꼭 죽은 사람처럼 들리지 않는가? 천성적으로, 그리고 불운으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런 기질을 더 고양시키는 데 배달 불능 우편물들을 분류해서 태우는 것보다 더 적합해 보이는 일이 있을까?

그런 우편물들은 매년 대량으로 태워진다. 때로 접힌 편지에서 창백한 직원은 반지를 꺼낸다. 반지가 끼워졌어야 할 손가락은 아마 무덤 속에서 썩어 가고 있을 것이다. 몹시 급한 구호금으로 보냈을 지폐를 꺼낸다. 그 지폐로 구원받을 수 있었을 사람은 더 이상 먹을 수도, 굶주림을 느끼지도 못한다. 사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절망에 빠져 죽었고, 희망적인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구제받지 못한 불행에 짓눌려 질식당해 죽었다. 생명의 임무를 받아 나섰건만 편지들은 죽음으로 질주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 pp. 86-87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27, 바다출판사에서 발췌


8955615876_1.jpg 허먼 멜빌,『필경사 바틀비』 ,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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