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관계에서 계산적인 사람이다. 직장처럼 특정 공간에서 관계를 맺는 동안에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잘 지내려 하지만 오래 이어지지 않을 관계 같으면 그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 p. 30
내가 관계를 맺을 때 우선순위에 두는 건 '존경'이다. 상대에게 배울 점이 있는지, 내가 상대를 존경할 수 있을지를 기준에 두고 내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내게 세상 무슨 일에도, 싫어하는 사람 한 명에게도 배울 점을 찾아보라 일러주었다. 그게 마음에 남아서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존경'을 기준에 두는 일이 많아졌다. 예를 들어 결혼에 있어서도 난, 굳이 결혼을 해야 한다면 내 남편은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던 것이다.
존경을 기준에 두고 관계를 맺는 게 가장 빛을 발하는 건 아무래도 직장에서였다. 나는 끊임없이 존경할 만한 사수를 찾았고 존경할 점이 없는 동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쉬이 받는 나로서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나도 성장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의 저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생각난다. 이 책의 좋은 점은 과하지 않은 자기반성과 발랄한 자기 성찰에 있다. 세상에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남에게 묻은 똥만 욕하는 겨 묻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 성숙한 인간이 되겠다는 성찰도 없이 본인이 성숙한 인간인 양 착각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교양 없다"는 문장이 탄생한 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숙고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얘기한 게 아닐까.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일 것이다. 그래서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저자의 이런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이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물론 성숙한 인간이라면 죽는 순간까지 섣불리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살피며 진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중략) 나는 이반 일리치처럼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8일 동안 무단결근하고 두문불출해도 잘릴 걱정도 없는 뼈대 있는 가문의 자식이 아니므로, 꼭 성숙한 인간이 되고야 말겠다."(pp. 74-75)
게다가 저자를 통해 직장 내 "수평적인 관계, 민주적인 대화,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지향하면서 맺은 동료들과의 관계"(p. 73)가 무엇인지 뼛속 깊이 느꼈던 나이기에 더욱더!
난데없는 퇴사와 난데없는 도스토옙스키가 엮인 책은 기획력이 돋보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서도('세입자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 유머를 잃지 않는 저자에게선 삶의 묘를 배운다. 세상에 이상한 대표들은 왜 그리 많은지. 그런 꼴 보이려고 월급 안기는 것 같은 현실 사장들에 대한 구구절절 에피소드는 공감을 넘어 통쾌하기까지 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왜 직장인들이 매일 가슴속에 사표 하나쯤 품고 출근하는지, 그 이유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감이 이 책을 세상의 모든 사장님들께 권한다.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들이 가슴속에 사표를 품을 때, 여러분들은 가슴속에 '좋은 사장'을 꿈으로 새겼으면 하는 바람에서. 언젠가 내가 사장이 될 날이 온다면 그때 매일 아침 성경 큐티 공부처럼 이 책을 필사하리. 그게 도스토옙스키가 꿈꾸었던 더 좋은 세상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길 아닐까.
덧. 사장님들께 이 책과 세트로 이다혜 작가의 책 <출근길의 주문>을 큐레이션한다. 두 책 모두 이 땅의 권력자인 여러분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에 대해 친절하고 적확하게 언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예로부터 인간이란 이렇게 비루하고 남루해서 삶의 의미를 잃기도 했겠구나.
이렇게 가족, 친구 동료와 불화하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면서 자괴했구나.
누군가를 죽일 듯이 증오하고 욕망에 눈이 멂어 도의를 저버리기도 했구나.
(중략)
최선을 다해도 누구나 형편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 건 삶의 이치인지도 몰라.
지난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최대한 미소와 평심을 잃지 않으면서, 오로지 급여를 생각하며 길게 일할 참이었으나, 결국 직장 생활 통틀어 가장 빨리, 가장 과격한 의사소통인 싸움을 거쳐 그만두게 되었다. 대표가 나를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 모든 시도가 힘들었고, 무엇보다 업무 흐름을 그르치는 그의 판단을 더는 존중할 수가 없었다.
- p. 41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을 긴 풀 네임, 약칭, 여러 애칭으로 불러서 누가 누구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걸리도록 하는 불친절함, 하루 이틀 밤 이야기를 1000쪽 이상의 분량으로 풀어내는 집요함과 심오함에 임하기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 우아하게 '을'이 되는 법 (1) p. 193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며 제 한 몸을 건사하는 사람들, 비록 자신의 고용인이라도 모욕을 준다면 참지 않는 사람들, 여행도 의식주도 학업도 필요 이상의 소비 대상으로 전락해 박탈감을 안겨 주는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만큼 우아한 이들이 있을까. 땅콩 봉지 하나 때문에 큰 모욕감을 느껴 여객기를 회항시켰던 한 항공사 회장의 자식으로서는 절대 지닐 수 없는 미덕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우아함일 것이다.
- 우아하게 '을'이 되는 법 (1) p. 204
결코 눙치고 넘어갈 수 없는 무엇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주도권 문제였다.
남작은 나를 마치 장군의 하인 취급하면서 나에 대한 불만을 장군에게 호소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첫째, 내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둘째, 내가 마치 자기 한 몸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략)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였다. 가정교사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 일의 책임은 바로 장군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어째서 장군님이 저를 대신해서 남작님께 책임지겠다고 나섰습니까? 제가 장군님 집안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단지 장군님 집에 있는 선생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자식도 아니고 당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장군님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저 또한 법률적으로 권한을 갖는 한 인간이고 나이도 스물다섯 살입니다. 대학의 박사 후보생이고 귀족입니다. 그리고 장군님과는 완전히 남남입니다.
- p. 209
우리나라 노동 계약서에 의하면 모든 직장인은 '을'이다. 슬퍼할 일이 아니다. 사전에 의하면 을이란, (1) 둘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그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 (2)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둘째를 이르는 말이다. 노동 계약서에서 갑을이란 (1)번을 가리키지 (2)번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현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 잘 안다.
(중략)
부당한 수모를 견디기도 해야 하며, 사적인 요구일지라도 때로 고용주나 상사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척이라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때로 개인 생활과 업무적 상황이 겹치기도 해 애매해질 때도 있다. 아무리 애써도 완전하게 피해갈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주도권까지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내 삶까지 좌우하려 할 때, 즉 내 삶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는 양 굴려 할 때 거절할 만한 지혜와 배짱은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내 인생의 모든 행운과 불운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감당하겠다는 주인 의식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아직 멀었단 걸 알았다. <노름꾼>의 가정교사의 대처에 정말 놀랐으니 말이다.
- pp. 213-214
현대 사회에서 카리스마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줄 알고, 정직하며, 타인의 말을 경청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내며, 빠르게 판단하고 원활하게 소통하며, 약자를 하대하지 않는 공정함 등으로 설명된다.
- p. 241
자신의 진심이 들킨 듯하자 바르바라는 바보, 배은망덕이란 말로 다샤를 몰아붙인다. 극도로 흥분하는 바르바라와 달리 다샤는 시종 차분함을 유지하며 필요한 말 외에는 전혀 하지 않는다.
바르바라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중략) 당황스럽지만 당신의 뜻을 무조건 따르겠다든가, 정도 아니었을까. 하다못해 소문에 대해 해명하거나 사죄해서 자신을 안심시켜 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샤는 "그래야 한다면 그러겠다"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제가 느낀 불쾌함을 표현하고, 상대의 진심을 겨냥했다.
-p. 247
여전히 기업의 대표나 상사, 정치인, 대학교수처럼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이들은 젊은 부하 직원이나 관계자 들을 '딸'처럼 생각해 신체 접촉을 시도하기도 하고, '자식'처럼 생각해 업무 외 감정적 육체적 노동을 부여하기도 한다. 난데없이 새로운 부모를 얻은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진짜 혈육을 책임지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어느 순간 사적인 관계에서도 '가족같이 생각한단 말'을 대단히 불신하는 사람이 되었다. (중략)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이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당한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강요하고, 자신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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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