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제가 지문 밖을 상상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는데요. 고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 모의고사 영어 시험 문제에 이런 지문이 나왔어요. 동네 바보가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는데, 치과의사가 바보를 놀려요. 이를 뽑아가지고 굴리라고 했던가, 이를 강아지처럼 끌고 다니면 안 아플 거라고 한 거죠. 바보가 치과의사 말대로 하니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어요. 이런 지문을 제시하고 이 글의 정서를 묻는 문제가 출제됐어요. 1번 웃기다, 2번 슬프다, 3번 우울하다 같은 선택지가 제시됐는데, 저는 '우울하다'를 선택했다가 틀렸어요. 저는 현실에서 내 친구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를 상상하고 우울하다고 했는데, 정답은 '웃기다'였죠. 영어 선생님한테 따졌어요. 이게 어떻게 웃기냐고요. 슬프고 우울하지 않냐고. 그래서 혼났죠. "시끄러, 웃기다면 웃긴 줄 알어."
- '1.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p. 28
엄기호 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게,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사람들의 리터러시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문제제기하신 것처럼 '이것이 리터러시다'라고 정의하는 것,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게 바로 권력이거든요. 이것이 리터러시다 하면 저것은 리터러시가 아닌 것이 돼버려요. 그렇게 리터러시를 정의한 다음에,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것, 그것이야말로 권력이죠.
- '1.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pp. 36-37
김성우 두 번째 편향은 문(文)이라는 것을 협소하게 정의해서 텍스트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거죠.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맥락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문해력에서 문이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관련 논의들에서는 관계 혹은 관계성이라는 것이 거세된 채, 내가 혹은 상대가 텍스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텍스트', '너-텍스트'는 보는데 '나와 너', 궁극적으로 '현재의 맥락에서 텍스트를 공유하고 있는 나와 너'를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이건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제가 겪은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모 잡지에서 청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주제가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말'이었는데, 그때 쓴 글이 제가 5년여 동안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엮어 《어머니와 나》(김성우, 2018)라는 책을 냈을 때의 이야기예요. 공부 때문에 타지에서 좀 오래 살았는데, 돌아와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됐어요. 그때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기억할 만한 대화를 녹취하기 시작했고 이게 5년여 쌓이니 꽤 두툼해졌죠. 평범한 일상의 대화들이었지만 대화를 기록하면서 리터러시에서 관계라는 측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나누고 이해한다는 게 단지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거죠.
그 책이 나온 다음에 어머니를 만나서 밥을 같이 먹고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면서 책을 드렸어요.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어머니한테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성우야, 책을 다 읽었다."라고요. 책을 드린 지 4시간이 채 안 되었는데, 지하철 승강장 벤치에 앉아서 다 읽으셨던 거예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판형도 작고 쪽수가 많지 않은 책이지만 한 권이잖아요. 솔직히 저는 서너 시간 동안 집중해서 책 한 권을 읽을 만한 능력이 어머니한테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어머니가 기독교인이라 성경을 읽긴 하시지만 문해에 익숙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서너 시간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으신 거예요. "어떻게 다 읽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우리 이야기잖아."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제 어머니 얘기를 왜 하냐면, 어머니는 성경을 여러 번 읽으셨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회의 기준에서 봤을 때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사셨어요. 그런데 한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내신 거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자기 삶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삶과 유리된 글은 누구도 쉽게 읽을 수가 없거든요. 제게 법학자가 쓴 논문을 주고 읽으라고 하면 굉장히 힘들어할 것이고, 못 읽어내는 부분도 많을 거예요. 텍스트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으면 모두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삶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거죠. 내가 원하는 내 삶의 텍스트를 써내고, 읽어내고, 평가받을 수 있는 권력이 없는 거예요. 시험도 그렇고, 교육제도도 그렇고, 보편성과 일반성을 추구하는 과학이라는 체계 또한 그런 권력을 용인하지 않거든요.
- '1.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pp. 46-48
엄기호 이 대담을 시작하면서 제가 글이 만들어낸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나는데요. 글은 읽는 존재를 주체로, 나머지 모든 존재, 철학에서 타자라고 하는 모든 존재를 주체인 내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설정하죠. 그래서 읽는 것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자 의미를 부여하는 적극적인 행위, 타자들에게 존재를 돌려주는 결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텍스트를 읽을 때 그 텍스트를 대상으로만 생각할 뿐 지금 나와 교감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이 주체성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중략) 무엇보다 관계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세계를 짓는 일이니까요.
- '1.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p. 28
김성우 신영복 선생께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방향을 잡아가면서도 끊임없이 나침반 바늘 끝이 떨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죠. 떨림이 없는 나침반은 고장 난 거라고요.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리터러시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건 리터러시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없는 거예요. 내가 읽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할 수 있는가를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죠. 나는 갖춘 사람, 상대는 갖추지 못한 사람. 나는 우월한 사람, 상대는 열등한 사람.
- '1.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p. 56
김성우 학생들한테 많이 들었던 얘기가 대학원 석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말이었어요. 영어로 글을 쓰는 건 고사하고 한국어 글쓰기도 본격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었죠. 글쓰기를 위해 생각을 확장하는 방법, 글의 구조와 내용을 다루는 전략, 글쓰기에 대한 태도와 윤리 등에 대해 거의 배운 적이 없다고 했어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길을 가르쳐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 '2.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p. 109
엄기호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결국 읽기의 문제와 결합돼 있다고 봐요. 예전보다 독서를 안 한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은데, 읽는 양으로 보면 지금 훨씬 많이 읽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양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읽는데, 한 이벤트의 길이라는 면에서 보면 굉장히 짧아졌어요.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저는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쪽글도 쓰게 하고 긴 글도 쓰게 합니다. 처음에 일단 쓸 수 있는 만큼 조금이라도 써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학생이 A4 용지 한 장 정도 써요. 제가 그 글에 대해 여기에는 사례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부분은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지니까 학자들을 인용하거나 해서 정당화를 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에피소드의 삽입이 아니라 논리적 연결고리 혹은 묘사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코멘트를 하면서 조금씩 쓰는 글의 양을 늘려가게 하죠. 이러다 보면 A4 한 장 분량의 책 한 권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요.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A4 용지 세 장 분량으로 늘리지를 못해요. 그 이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중략)
글은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글을 쓸 때는 그 글이 당대를 넘어 후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말과 달리 기록이잖습니까. 그러니 글을 쓰는 것은 추상성을 높여 치밀하게, 체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한편에서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이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 내의 정합성과 논리성과 인과성과 핍진성을 다 맞춰내야 하는 거죠.
(중략)
자기 사유가 없는데 독창성이 있을 리 없죠.
- '2.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pp. 110-112
김성우 그러니까 우리가 엄밀하게 두통이라는 걸 정의한 적도 없고 심하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합의한 적도 없지만, 사회 속에서 소통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거죠. 아니, '살아지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언어가 갖고 있는 강점이자 약점이라고 봅니다.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 이해한 척 사는 거고, 그래도 서로에게 아주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 물론 예외는 있지만요.
완벽한 이해는 당연히 불가능한데, 책을 읽었을 때와 사람을 만나서 표정을 보고 말투를 들었을 때, 영상을 봤을 때, 이해나 사유의 방식이 다 다른 거죠. 그 방식들을 골고루 균형 있게 성장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 '2.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p. 128
김성우 하지만 어휘는 평생 발달해요. 그런 말 많이들 하잖아요. 작가들은 단어 공부를 평생 한다고요.
이런 과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긴 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저자의 관점을 파악하는 능력, 여러 글을 엮어서 자기 생각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 텍스트로 설명하고 공감하고 논쟁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해요. 리터러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들이 발달하는 거죠. 이걸 위해서는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 '2.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p. 132
엄기호 사실 읽기와 보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요새 많이 하는 말로 '어디서 읽고 보는가'라는 플랫폼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파일을 다운받아서 보는 것, 혹은 넷플릭스를 보는 것 등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읽는 것과 보는 것 중에서 어떤 것에 익숙해져 있는가라는 문제가 하나 있고, 어디에서 읽고 보는가라는 문제가 또 하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랫폼, 매체, 그리고 인간의 행위 사이에 어떤 순환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어떤 특정한 플랫폼, 공간에서 매체의 변화가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게 세계를 대하는 몸의 변화를 일으키죠. 그러고 나면 그 변화된 몸으로 다른 매체들을 사용해 세계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만나는 공간, 즉 플랫폼의 특성이 또 매체의 특성을 넘어 주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점에서, 아무래도 인터넷이라는 플랫폼 혹은 공간의 특성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공간의 읽기와 쓰기 사이에 아이러니한 비대칭성이 있다고 보는데, 쓰는 양과 길이는 무한대로 늘어나는 반면, 읽는 호흡은 점점 짧아지거나 요약적으로 되는 거죠.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시시콜콜하게, 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쓰고 있어요. (중략)
그러다 보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뭘 이런 걸 쓰냐." 또 "뭘 이렇게 길게 쓰냐." 하면서 휙휙 넘기며 확인만 하려고 하죠. 쓰는 사람은 길게 쓰는데 읽는 사람은 촘촘하게 읽지 않아요. 그렇게 긴 글, 짜임새가 촘촘하지 못한 글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죠. 그 결과 그 사람이 글을 이끌어가고 구성하는 방식, 방법론 등은 간과하고 결론과 핵심만 봐요. 이건 깊이 있게 글을 읽는 것이 아니죠.
쓰는 사람은 무한대로 길게 쓰고, 읽는 사람은 가급적 결론만 요약해서 보려고 하는 이 비대칭성에 의해 독자의 죽음과 저자의 죽음이 모두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독자는 그저 글을 읽는 사람,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 있게 읽는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단순하게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깊이 있게 읽는 독자입니다. 글을 촘촘하게 읽으며 그 사람이 글을 구성해가고 논증해가는 방식, 즉 방법론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독자입니다. 이런 독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 '3. 읽기에서 보기로, 미디어와 몸', pp. 156-157
엄기호 리터러시뿐만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결국 앎의 문제일 뿐 아니라 앎을 다루는 것의 문제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강조했던 게, 아는 것으로 그치면 아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걸 잘 보여주는 책이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피에르 아도, 2017)입니다. 이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한 이유는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라고 말해요. 앎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죠. '학파'를 의미하는 school도 공부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 아니라 공부하며 공부한 방식대로 살기 위해 모인 삶의 공동체에 가까워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같고, 그 이해를 더 심화시키며, 그렇게 살도록 서로 권장하기 위해 모인 게 학파라는 거죠. 따라서 이들은 실천해야 한다고 봤어요. 첨언하면 지행합일과는 다릅니다. 알면서 안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앎은 곧 다룸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룰 줄 알아요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 '3. 읽기에서 보기로, 미디어와 몸', pp. 166-167
엄기호 (《도서관 여행하는 법》)에서 사례로 들고 있는 북미의 도서관들에서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참고봉사 데스크(reference desk)라고 합니다. 이곳은 안내 데스크와는 별도로, 이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고 해요. 세상의 모든 질문에 대해 길을 찾아주려고 사서가 이용자를 만나는 곳인 셈이죠. 책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것을 넘어, 질문을 가진 사람을 환대하고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길을 안내하는 곳입니다. 이를 통해 도서관이란 질문에 답을 찾으면서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환대하는 곳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죠.
- '4. 리터러시,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pp. 202- 203
김성우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사람과 이야기를 해서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거예요. 구술사 프로젝트가 됐든 문화기술지 프로젝트가 됐든,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공부를 안 했으면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질적 연구를 하다 보니 관찰을 하고 인터뷰를 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저랑 생각이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저랑 생각이 똑같은 사람이랑 얘기를 하면 논문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질적 연구나 구술사 프로젝트를 하듯이, 자신과 생각의 결이 많이 다른 사람과 인터뷰를 해서 그걸 정리해보고, 이 사람이 왜 그런 용어를 써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해보는 거죠. 인류학적 조사방법론이 리터러시 교육에 주는 시사점이 있어요. 내가 그동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을 찾아가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무엇보다 기록해보는 것, 기록해서 성찰적으로 글로 풀어내보는 작업,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4. 리터러시,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p. 214
엄기호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돌봄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돌보기 위해서는 이해를 해야 되거든요. 돌보기 위해서는, 알아듣는 것은 배려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계의 파탄에는 이 '돌봄 역량'의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거예요.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굽니다. 아는 것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을 조심하는 것도 아니라,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문자 그대로 '함부로' 대해요. 그러니 관계는 파탄이 나고 사람을 피하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리터러시에서 특히 말귀를 강조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말귀가 열려 있어야 돌볼 수가 있고, 또 돌보는 와중에 말을 알아듣는 역량이 커지거든요.
- '4. 리터러시,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p. 217
엄기호 그 삶의 과정과 의미를 두껍게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있기에 이런 얘기를 하는가, 혹은 왜 저런 얘기는 못 하는가, 이걸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되어야 삶을 위한 리터러시이자 삶을 읽어내는 리터러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리터러시의 핵심이 모르는 걸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위협받지 않는 준에서 전혀 모르는 낯선 타자를 만나서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이야기를 듣는 경험을 하는 걸 학생들에게 권장하죠.
- '4. 리터러시,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pp. 218-219
엄기호 김도현 선생이 쓴 《장애학의 도전》에서 설명하는 것에 따르면, 그게 한 개인의 '전기적 요소'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 인생살이가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다 비슷하게 살지만 누구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삶의 궤적이 다릅니다. 남들과 다른 만큼, 그 궤적들이 모여서 '나'라는 사람의 인격을 구성하는 거죠.
결국, 자기를 세상에 계시한다는 것은 자기 삶의 궤적에서 만들어진 자기만의 고유함을 계시하는 것이 됩니다. (중략) 그 사람에게서 듣지 못하면 영원히 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중세시대까지는 누군가가 임종을 앞두고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해요. 죽는 순간에 하는 말은 진실일 가능성이 크고, 그 사람이 죽고 나면 다시는 그 말을 못 듣기 때문이죠.
- '5. 삶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을 향해', pp. 232-233
김성우 모티머 애들러는 대화 상대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반박이나 동의를 하지 말자고 해요. 이해하지 않고 찬성과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건 어리석고 무례한 일이라고 지적하죠(모티머 애들러, 2020: 247).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그런 짧은 호흡, 내가 당장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 시간의 개념을 바꿔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긴 글이라는 게 단순히 길이가 길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읽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고 자신을 돌아보며 심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긴 글이에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측면이 드러날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의 반전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런 건 긴 글을 끝까지 읽어야 경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소셜미디어에서는 당장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 '5. 삶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을 향해', p. 246
엄기호 성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굳이 나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지금 우리가 자기의 정당성과 타당성에 강박적이라고 생각해요. 왜 이렇게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하는가? 인격적인 문제도 있을 거고 습관의 문제 같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당화되는 것만이 성과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정당화되지 않는 걸 어떻게 성과라고 제출을 하겠어요. 논문도 디펜스가 잘 되어야 인정을 받잖아요. 자기 정당화 문제와 성과가 너무 밀접하게 결합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거죠. 성과를 안 내도 된다는 것을 통해 제가 학생들에게 만들려고 하는 태도는 굳이 그렇게 자기 정당화를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나를 그렇게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내가 굳이 너를 비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이해라는 리터러시의 측면에서 본다면, 세계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의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말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사람의 의견이고 그 의견은 내 의견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극을 준다는 점을 성찰해낼 수 있거든요. 리터러시 교육이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양한 말을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하고, 그 말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줄 알아야 하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하나의 '의견'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나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의견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너무 빨리 판단하기 전에요.
특히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간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성과사회에서는 성과 자체만큼이나 속력이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성과를 내야 하냐면 아주 빨리 내야 되는 거예요. 제가 몇몇 책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역사가 아니라 '실시간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썼는데요. 읽고 의미를 빨리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걸 다룰 수 있는 능력까지 가려면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 실시간의 세계에서는 생각할 시간이 안 주어집니다. 생각하기보다는 빨리 판단해서 빨리 성과를 제출해야 할뿐더러, 그게 성과가 되기 위해서는 남을 논박해야 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성을 바꿔내지 않으면 우리가 얘기하는 리터러시는 불가능합니다.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만 실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 생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했던 것과 연결되는데, 우리가 왜 시간을 들여서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 모르기 때문이거든요.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깊게 생각을 하든 길게 생각을 하든,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서구 속담에 "인간은 아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잖아요. 모르니까 생각을 하는 거고, 아는 것은 행합니다. 리터러시 교육에서 핵심은 모르는 걸 발견하는 게 성과가 아니라 성장의 촉발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이것은 성과사회로부터 벗어날 때만 가능하죠.
- '5. 삶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을 향해', pp. 248-250
김성우 말 주위로 권력과 욕망, 아픔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가져오고 이름을 정하는 데 필요한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고,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죠. 삶과 세계를, 거기 살고 있는 감정과 모순을 지워버리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이건 단순히 말실수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망각, 맥락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중략)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사건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이에요. 말을 쓰는 것은 늘 삶에 잇대는 행위이고,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습득은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 '5. 삶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을 향해', p.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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