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참 여러 일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k씨는 백수가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 번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기거든요.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을 무난하 게 지냈어요. 대학에 진학할 때도 그렇게 크게 고생하지 않았어요. 아무래 도 서울권 대학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 서울'이라는 목표도 없었거든요.”
“고등학생이 대학에 욕심이 없다는 건 신선한 이야기네요. 진로에 대한 걱 정은 없었나요?”
“아뇨, 단순히 노는 게 좋았습니다. 음... 생각 없이 놀러 다닌다기보다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경험을 하러 다니는 게 좋았다는 겁니다. 남들처럼 똑같 이 공부하고 똑같은 대학을 바라보고 똑같은 직장을 가진다는 건 안정적 이지만 참으로 재미없는 인생이거든요.”
“인생은 재미로만 살 수는 없죠. 그런 소리 많이 들어봤을 텐데요?”
“네 맞아요. 주변 어른들은 물론이고 선생님, 가끔은 친구들도 한심하게 바라보곤 했어요.”
“그럼 남들과 다른 무언가,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어요. 다들 스펙 쌓는다고 진로와 관련된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없으면 자율 동아리로 만들어 활동할 때, 저는 밴드 동아 리를 하면서 공연을 다녔어요. 한 번의 공연을 위해 밤새 연습하고 주말엔 공연을 하러 가기도 했지요. 주변에서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그래 도 음악이 좋았어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악기들이 모여 하모니를 이루 는 순간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에요. 서로 다른 개 성을 가진 악기들이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연주자를 만나 하나의 호흡을 이 룬다는 그 사실이 너무 좋았어요. 아, 그리고 놀러만 다닌 건 아니었어요. 글 쓰는걸 좋아해서 자율동아리로 토론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어요. 아쉽 게도 이과 계열에서 토론동아리는 인기가 없었지만 말이에요.”
“학원가고 과외하고 할 시기의 학생과는 다른 시기를 보냈네요. 그렇다면 대학은 어떻게 가셨나요?”
“무난하게 집 앞에 있는 학교로 갔어요. 국립대라서 등록금 걱정도 없고 집에서 다닐 수 있어서 추가로 나가는 비용도 없었기 때문이죠. 솔직히 말 하면 서울의 생활을 동경하긴 했어요. 지방에 살아서 서울에 대한 로망? 그런 게 있었거든요. 지방에 사는 사람은 다들 알거에요. 오죽하면 지하철 타고 등교 하는 모습이 부러울 정도였다니까요? 재미있는 점은 대학을 졸 업한 지금도 서울에 대한 로망은 여전해요. 갈 때마다 두근거리거든요.”
“그렇다면 대학생활은 어떻게 보냈나요?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한다 고 하셨으니 에피소드가 많이 있을 같은데.”
“생각보다 무난하게 살았어요. 고등학교 때와 똑같이 동아리를 우선으로 하고 충분히 즐겼죠. 안 해본 활동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평범한 대 학생처럼 시간을 보냈어요. 공부도 하고 대외활동도 하면서 말이에요. 하 지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그게 뭔가요?”
“방향...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지 목적이 없었어요. 순리를 따라 수능을 준비하고 대학에 진학을 했지만 도착점이 아니었던 거죠.”
“그렇죠.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흔히 하는 고민이죠.”
“대학을 가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해야 하는 것' 투성이었어요. 찬란한 대학 생활은 잠시, 2학년 때부터 몰아치는 전공 공부에 그 때부터 느껴지는 '적성'의 존재, 그리고 다가오는 '책임'이 라는 무게. 캠퍼스를 거닐며 사랑을 이야기하고 우정을 나누는 청춘드라마 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취업을 위해 방학마다 자격증을 준비하고, 대외활 동을 고민해요. 공모전을 찾아보고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을 하며 어떻게든 스펙 한 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죠. 왜냐고 묻는다면, 나도 쓸모가 있다 고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쓸모요?”
“네, 나도 이 세상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 을 알리고 싶어요.”
그렇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만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처럼 내 존재가 뚜렷했으면 좋겠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 찬란한 빛을 내며 등장한 나의 존재가 당신에게 희망이 된다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어느 누가 필요로 할까.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느끼는 정적인 필요 말고 하나의 온전한 '역할'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며 집단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럼 반대로 질문해볼게요. 지금 k씨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는 의미인 가요?”
“면접을 보는 이 순간에도 면접관님은 저를 필요로 하시나요?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을 테스트하기 위해 면접을 진행하는 건 당연히 알고 있습니 다. 하지만 저를 보자마자 확신이 서시나요? 아, 이 지원자는 꼭 잡아야한 다. 회사에 정말 필요한 인재야! 이런 마음이 드시나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게 아닐까요?”
말문이 막혔다.
사실 생각해보면 단순한 문제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보고 첫 눈에 매력을 느꼈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게 집단이든, 사람이든. 내가 진 정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의 쓸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가치의 증명이 었다. 필요에 의해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능력 을 보고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
가능성, 그래 가능성이다.
내 잠재력을 알아보고 나를 성장시켜줄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특히 회사와 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서는 섣불 러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죠. 그래도 저는 당신에게, 회사에게 도움이 되 고 싶어요. 내 잠재력을 알아보고 가능성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해요. 나를 얻기 위해서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필요에 의해가 아닌, k씨를 위해 필요를 만들어내라는 말인가요? 굉장히 이기적인 마인드라 생각합니다.”
“이기적인게 잘못됐나요? 요즘 세상에 나를 위해 살아간다는 건 필수적이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으 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를 가진 채로 나의 이익을 추구한다 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사람과 사람이 마주했을 때는 분 명한 목적이 있다. 남에게 아무 대가 없이 베풀기만 하면 그거야말로 호구 이다. 조건 없이 잘해주고 내 것을 나누고 부탁을 들어주다보면 상대는 ‘감사합니다.’ 하며 나에게 똑같이 잘 해줄까?
알 수 없다.
대가를 바라고 선행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만,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말처럼 순수하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선행이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진다면 그때 깨닫게 된다.
아, 나는 호구였구나.
처음엔 감사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호의가 계속되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99가지를 잘해도 1가지를 잘못하면 욕먹는 것처 럼, 계속 잘해주다 한번 잘못하면 나쁜 놈으로 찍히는 것처럼 말이다.
“k씨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인가요? 그런 마인드로 회사에서 남들과 함께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할 줄 아니까요. 사적인 자리가 아니잖아요.”
“어쩐지 날이 서있는 듯한 답변이군요. 방어적인 태도 말이에요. 주로 이 런 태도를 보인 사람들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멀어진 유형인데, 혹시 사람 과의 관계에서 문제라도 있었나요?”
정곡이다.
아마 살아오면서 제일 어려웠던 문제가 사람이었을 것이다. 공부하고 학습 해도 변수가 너무나 많은, 같은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늘 다른 결과가 나오 는 그런 문제였다.
“참 아무렇지 않게 정곡을 찌르시는군요.”
“저야 사람 보는 게 일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k씨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k씨가 관계에 있어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참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