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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모 Sep 03. 2020

끝내 재현된 마지막 춘화 한 장

영화 <아가씨>의 엔딩씬에 관하여

영화 〈아가씨〉의 엔딩씬, 뒤틀린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계로서의 제국-일본-식민지 조선의 땅을 벗어나 망망대해의 배 위에 탄 숙희와 히데코는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남자들을 비웃듯 장갑과 결혼반지, 분장한 콧수염를 바다 위로 내던진 후 웃음 짓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예쁘게 좌우 대칭의 구도로 세팅된 선실 내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 장면에서 춘화를 보는 남성들의 뒤틀린 성적 욕망의 상징이자 코우즈키 백작에 대한 히데코의 트라우마의 상징이었던 은방울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두 여성의 성적 욕망의 유희를 더해주는 매개물로 전복된다. 그리고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은방울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달이 뜬 검은 밤바다와 배를 비추는 전경 쇼트, 이내 바다 위에 뜬 달은 코우즈키의 저택에서 숙희와 히데코의 침실을 이어주었던 문 위에 그려진 달 그림으로 디졸브된 후 영화는 끝이 난다.


이렇듯 〈아가씨〉의 엔딩씬은 세심하게 정제된 미장센과 음향, 그리고 디졸브로 인해 아주 유려하게 영화를 끝맺음한다. 아카데미 미술상을 수상할 만큼 이 영화는 영화 속 미술에 공을 들였고, 그 결과물은 감탄할 만하다. 엔딩씬 또한 이러한 미술과 미장센에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영화 〈아가씨〉의 엔딩씬은 '예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봤을 때 바로 이 엔딩씬의 '예쁨'에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이 영화의 엔딩씬이 예쁘게 끝맺어짐으로써 영화가 결국은 뒤틀린 성적 욕망을 가진 상류층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착취하며 소비했던 '춘화'의 한 장면으로 다시금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마지막 섹스씬을 즐기는 관객의 시선은 코우즈키의 낭독회에서의 관객의 시선과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 


 코우즈키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낭독회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의 체위를 그린 그림이 소실되어 관객들이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관객의 반응에 코우즈키는 히데코와 목각인형을 이용해 소설 속 체위를 직접 실현시킴으로써 관객들의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 장면은 〈아가씨〉에서 뒤틀린 남성들의 관객으로서의 변태적 욕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실된 그림 한 장을 (여성을 철저히 응시의 대상으로 놓음으로써) 실현시켜 끝끝내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뒤틀린 욕망. 〈아가씨〉는 이를 파멸시키고 탈주해야 할 대상으로 놓음으로써 두 여성의 사랑과 연대, 해방의 서사를 강조한다. 하지만 두 여성의 섹스를 대칭적으로 '보여주는' 이 엔딩씬의 쇼트는 사라진 춘화 한 장을 끝끝내 실물로 재현한 코우즈키 백작의 욕망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남성들의 변태적 욕망으로 소비된 춘화 속 은방울은 엔딩씬에서의 재등장으로 인해 과연 그 의미가 전복되어지는가, 아니면 다시 누군가에게 소비되어지는 춘화 속 한 장면으로 회귀하는가. 감독의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던 간에 나는 이 영화의 엔딩씬은 하고자 하려는 말이 보고자 하는 욕망에 끝끝내 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낭독회에서 읽혀진 책의 소실된 마지막 그림 한 장을 다른 버전으로 재현한 것이 〈아가씨〉의 엔딩씬이다. 이 '다른 버전'은 분명 영화 속 뒤틀린 남성들이 원하는 폭력과 착취의 욕망과는 달리 (대칭적 구도로 의도한 바와 같이) 평등하고 상호 유희적이며 주체적인 관계이자 욕망이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누군가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킬 또 다른 춘화이다. 춘화 속 인물들은 응시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섹스는 보여짐으로서 소비된다. 〈아가씨〉의 엔딩씬은 이 영화 또한 결국 '다른 버전'의 춘화를 만들어냈음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 〈아가씨〉의 명백한 한계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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