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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사 Aug 31. 2015

Mark Rothko를 만나다

내 안에 잠기는 시간

로스코 그림에 특별한 매력을 느꼈던 것은 2002년 퐁피두 센터에서 로스코란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였다.

현대 미술에 대해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닥 관심이 없어서, 퐁피두 센터에 갔을 때도 그 안의 피카소나 칸딘스키 그림 같은 것 보다는, 퐁피두 센터 건축물에 더 큰 감명을 받았었다.
복닥거리지 않고 널찍하니 여백이 많은 큐레이팅에 감흥없이 심드렁하게 전시품들을 살펴보다가 딱 걸음을 멈추었던 게 로스코 그림 앞이었다.
굉장히 단순한 사각형, 칼라로 이루어진 대형 그림이었는데,
칸딘스키랑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듯, 전혀 다른 로스코의 그림.
왠지 모르게 끌려. 보면 볼수록 좋아.

이게 로스코 그림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파리의 미술관 기행에서 건진 나의 아티스트들은, 루브르의 램브란트 자화상들, 오르셰의 휘슬러와 이름모를 작가의 커다란 캔바스 위에 그려진 눈 그림, 부르델 미술관의 거대 조각상들, 그리고 퐁피두의 로스코였다.

로스코를 다시 만난 건, 십오년 정도 전 모교 도서관 계단 벽에 걸린 레플리카였다.

최근까지, 로스코 그림의 가격을 알지도 못했고 심플한 그림에다가 (내 기준에) 그닥 유명 작가가 아니라 비싸봤자 얼마리, 생각하면서 도서관 벽에 걸린 그 그림이 진품일 거라 생각했었다 ㅋㅋㅋㅋ

하지만 레플리카임에도 그 그림이 주는 느낌이 참으로 좋아서, 도서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계단에 서서 그 그림을 한참 쳐다보다 오곤 했다.

그리고 최근엔, 테이트 모던과 레이나 소피아에서 로스코를 만났고, 이젠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로스코를 만나는구나, 그 레드를 직접 보게되는구나, 감격하며 막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전시소식을 듣자마자 4월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침 9시 차 타고 출발해서 집에 돌아오니 밤 9시. 마크로스코를 위한 꼬박 열두시간의 나들이었다. 


지방에 살면서 전시회 하나만을 위해 시간과 체력, 돈 쓰는 거 쉬운 일은 아니지만... 로스코니까. 서울 살 때는 내키면 휘익 하고 다녀왔지만 지방에 내려와 살면서부터 공연과 전시는 아무래도 엄선하게 된다.

기대는 버리려고 노력했다. 해외에서 열리는 기획전시라는 게, 아무래도 한계가 있잖은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막상 가보면 그림의 양이나 질, 큐레이팅 모두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로스코 전은 기우였다. 작품의 수도 그렇고, 주요 색면시대 그림 충분히 풍요로웠고, 후기 벽면화 시절의 로스코 채플도 재현하질 않나, 마지막 작품 레드까지.... 정말 흡족했다.

무엇보다 로스코가 강박적으로 주장했던 전시 조건들을 지키려고 애쓴 큐레이팅이 참 좋았다. 요약하자면 화가에게나 관람객에게나 정성스런 전시였다. 덕분에 의자에 앉아서, 방석에 앉아서 원하는만큼 전시를 누릴 수 있었다. 좀 뻔뻔했다면 긴 방석에서는 누워서 보고도 싶었지만, 그건 차마 ㅠㅜ

도슨트는 작품과 관객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로스코의 의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개개의 작품 해설보다는 배경이나 미술사조에 대한 해설을 주로 해주어서 좋았다. 시간이 없다면 굳이 도슨트 시간을 맞추기 보다는 홀로 오롯이 작품과 만나는 것도 좋은 듯.

공명.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동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공명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색으로 가득찬 수평의 단순한 그 그림이 나를 오롯이 봐주면서 다가와, 내가 보내는 파장에 함께 울리며 대답하는 그 느낌은,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감동이기도 하다. 

또한 구구절절 작품해설을 곁들여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없이 로스코 표현을 빌자면 작품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음, 어쩌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어필하는 화가일지도 모르겠다. 칸딘스키가 회화로 음악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과 상통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


어쩌면 로스코는 자기 작품이 거울 역할을 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기를. 

그러니 그의 작품이 후기에 채플을 만드는 벽면화가 된 것은, 필연인 것 같기도.

레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들어가서봤는데..
아, 역시나 참으로 서글픈 그림이었다.


친구는 사탄이 느껴진다는데,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붙잡고 싶어했던 삶과 열정을 느꼈다. 

레드는 마치 반어법 같았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없고 바라서는 안되는 영원불멸을 꿈꿨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종내 잡지 못하고 처연한 몸부림으로 남았으니. 

게다가 죽음을 통한 부활, 영생은 친구의 말처럼 사탄과 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가 작품활동을 통해 빛의 길로 나아가 신학에 귀결했다면 또 어떤의미로는 완생의 길이 되었겠지만 작품으로서는 죽음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그는 작품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했고, 노랫말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도 중요해, 결코 자신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치 혼을 레드에 옮겨놓고 육신을 저버린듯한 그의 선택은, 다소 오싹하긴 하다.
그저 붉디붉은 색상 하나로 그만큼의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다니,
그림의 기가 정말 지독하게 강해서 오래 보기가 힘들어 레드 방에서는 그 인상만 간직하고나왔다.

제일 오래 바라봤던 그림은 긴 세로의 자주색 그림이다. 


보고 있으면 한없이 고요해지고 성스럽고 지고의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그림 앞 방석에 앉아서 친구랑 조용히 이야기도 하고, 눈을 감고 느끼기도 하고.

만일 그가 노년에 레드가 아닌 자주에 꽂혔다면,

자기 자신을 자주로 물들였다면.....
아니 꼭 자주가 아니더라도 그가 오랜시간 그렸던 다채로운 수평의 그림들처럼, 따스한 분홍, 평온한 갈색, 생기있는 노랑, 젊은 파랑, 성숙한 초록처럼, 삶은 단색이 아니라 다채롭다는 것에 의미를 더욱 부여했다면,
마치 빛이 단색이 아니라 여러 색의 비춤인 것처럼
마치 검정이 단색이 아니라 여러색의 중첩인 것처럼
어두움과 빛은 하나고
검정은 마치 담요처럼 포근하고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테고
그랬다면 자신의 레드가 블랙에 삼켜질까 두려워하지 않았을테고
그의 그림은 지금처럼 비싸진 않았겠지만
로스코 자신은 평화로운 삶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2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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