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그것 말고는
작년 겨울 우리 부부와 큰 딸, 이렇게 셋이 동네를 산책하다가 남편이 갑자기 로또 두 장을 샀다.
" 자! 받아. 이건 너 가져. 토요일 날 맞춰 봐."
그렇게 큰딸은 생전 처음 로또 한 장을 손에 쥐게 되었다.
토요일이 와서, 로또를 맞춰 보는 방법조차 처음인 딸이 달뜬 모습으로 안방으로 달려왔다.
"5만 원 당첨이야!"
일치 숫자 4개, 4등에 당첨된 것이다.
"우와. 아빠는 꽝인데, 첫 로또에 5만 원 당첨 쉽지 않은 일이야. 완전 행운이네."
며칠을 지갑에 두고 다니다가 판매점에 같이 가서 상금으로 교환했다.
노란 오만 원 권을 생긋 받아 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더니
"엄마 줄까?"
"아이고, 너 가져. 좋지?"
행운도 불행도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얼마 뒤, 가슴을 쓸어내릴 엄청난 일이 있었다.
막내딸과 작은 갈등이 있는 대화를 이어 갔다.
화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책상과 방 사용 문제였다.
"버릴 거 버리고 정리부터 해야지."
이런 충고를 하다가, 속상해 있는 딸에게 몇 가지 제안도 했다.
"네 마음에 드는 책상으로 사줄까? 아니면 방을 바꿀까?"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 말고는 시원한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형광등 켜지듯 탁! 하고 켜졌다.
'만족을 모르면 내내 불행할 것이다. 모든 불평불만이 부질없다, 그냥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이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지금에 감사하고 살아야 돼."
대화의 결론으로 좀 갑작스럽고, 무언가를 건너뛴 것 같은 말을 하고 나는 씻으러 들어갔다.
잠시 뒤, 막내딸의 다급한 목소리가 욕실 밖에서 들려왔다.
"엄마! 큰일 났어. 언니 있는 데 지진 났대!"
재빨리 카톡을 확인해 보니, 지진이 나서 호텔 1층으로 대피해 있다는 것이다.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대만 여행을 가있던 딸아이는 이틀 뒤면 집에 올 예정이었다.
몇 시간 전에 오늘도 재밌었고, 간식 사서 일찍 숙소에서 쉴 거라며 신나게 카톡메시지를 보낸 후였다.
나는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와 검색창과 대화창을 오가며 상황파악을 했다.
타이베이 인근 해역에 규모 7.1 지진이 났고, 딸이 있던 지역은 여진 4.0의 강도로 흔들렸던 것이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동동거리는 발이 엇박자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 탓인지, 나는 우리 집이 지진으로 흔들리는 듯 어지러웠다.
남편이 딸에게 카톡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다친 덴 없는지, 겉옷은 걸치고 나왔는지, 여권은 챙겨 나왔는지, 지금 전화는 왜 못 받는지 궁금해하는 사이에 전화 연결이 되었다.
"아빠! 엄마!"
"너 괜찮아? 1층에 대피해 있어? 어떤 상황이야?"
"숙소에서 쉬는데 갑자기 엄청 흔들리는 거야. 너무 무서웠어. 외국인들이랑 다들 earthquake 외치면서 뛰어나오고, 놀래서 1층으로 대피해 있어."
놀라서 상기된 아이의 목소리에 긴박했던 직전 상황이 그려졌다.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통화였다.
'지진이라니, 여행 가서 갑자기 지진을 겪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가까운 일본의 지진 소식에도 감정적으로 실감하지 못했고, 대만이 지진이 자주 나는 나라인 것도 이번에 알았다.
챗 gpt에 검색해서 타이베이가 지진이 자주 나는 곳이라서 내진 설계가 잘된 편이라고 딸에게 전해 주었다.
딸이 머무는 숙소도 2017년에 전체 리노베이션 되었고, 대만의 강화된 내진설계 기준을 적용받았을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잠시 뒤 숙소로 일단 올라왔다고 카톡이 왔다.
친구들이랑 '꿈인가' 하고 멍하게 있다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침대 머리맡에 떨어질 만한 거 없는지 확인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신발도 신고, 옷도 챙겨 입고, 여권까지 챙겨놓고 자라는 말을 할까 했더니, 남편이 우리가 그러면 아이가 더 불안할 거라며 그냥 있자고 했다.
"언니! 내일 바로 비행기 타고 오면 안 돼? 비행기 표 있는지 알아봐."
몇 분 전까지 책상과 방 문제로 불만 가득이던 막내딸이, 가족단톡에서 제일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불안하지만 별일 없는 이틀이 지나고 딸아이가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공항버스 정차장에서 아이의 캐리어를 우리 차에 싣는 짧은 순간, 나는 아이 어깨에 팔을 감싸 안아 힘을 줬다.
최악의 상황은 상상에라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천재지변 앞에 '생명'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아이를 볼 수 없는 시간 동안 깨달았다.
지진 소식을 듣기 직전,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는 생각이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삶은 예측할 수 없다.
'생명'과 '존재'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는 게 거대한 자연 속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무사히 돌아온 우리 큰딸을 보며, 존재 자체의 감사함을 느꼈다.
바람에 흔들리고 꺾일 뻔할 때도 있지만, 다 같이 우리 가족의 가지로 단단히 존재할 때 가족이라는 나무는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