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장 한 뚝배기의 깨달음

고정관념은 등잔 밑 기회를 앗아간다

by 이디뜨

낯선 도시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자차를 이용하시는 분은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와 보이는 출구로 나오면 10m 거리에 있음.'

안내대로 주차를 하고 1층 출구로 나왔다. C와 D 건물 사이를 세 번을 오가고, C 건물 1층을 한 바퀴를 돌아도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10분째 '할머니의 부뚜막'이라는 청국장 백반집을 찾아다녔다.

"폐업했나?"

"운영 중이라고 나오는데?"

배고프니까 근처 다른 식당으로 가자는 남편의 말에 딱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내 눈앞에 카페인 줄 알았던 가게에 '할머니의 부뚜막'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 앞에 식당을 두고도 그렇게 헤맨 것이다. '할머니의 부뚜막'은 상상을 뒤엎고 파스타 집이나 카페 같은 모습이었다.

'청국장 백반을 파는 식당은 허름하거나 토속적인 외관을 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의 테두리가 물리적 시력까지 가려버렸나 보다.




카페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한 청국장 특유의 구수하고 콤콤한 냄새와 직화 불고기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런 감각의 배신이 없었다. 학창 시절 배운 '공감각적 심상', 이 상황은 영락없는 '공감각의 역설'이었다.

자리에 앉아 청국장과 돼지불백을 주문하자, 동그란 양은 쟁반에 정갈한 반찬 몇 가지와 돼지불고기, 쌈이 차려져 나왔다.

" 하아! 맛있다."

옆 테이블 손님이 먼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에서 청국장을 한입 떠먹으며 내는 소리였다. 침을 꼴깍하며 물을 한 모금 따라 마시는 사이에, 우리 테이블에도 밥과 청국장이 나왔다.

갓 지은 듯한 찰진 흑미 밥은 나무로 된 움푹한 그릇에 소복이 담겨 있어, 나무 주걱으로 놋그릇에 옮겨 담았다.

예상한 대로 청국장은 뜨끈하고 구수하게 입안을 휘감았고, 불맛 나는 돼지불고기와 새콤달콤 파무침, 담백한 밑반찬은 찰진 밥과 환상의 조합이었다.

"사장님! 밥 조금만 더 주세요."

밥과 반찬은 리필이 된다기에, 우리는 반 공기 정도 밥을 더 받아 청국장 뚝배기 밑바닥까지 보이게 싹싹 긁어먹었다.

"속이 뜨듯하고 좋네. 어쩜 여길 찾기가 이렇게 어려웠지?"

10분 넘게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도 그곳이 내가 찾던 목적지임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할머니', '청국장'이라는 단어에 덧씌운 내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얼마 전 인터넷 영상에서 본 시골 노부부의 아침식사 모습이 떠올랐다. 갖가지 주방도구가 쓰기 좋게 걸려 있는 친근한 모습의 주방 식탁 앞. 부부가 아침식사를 시작하는 영상이었다. 식탁에는 따뜻한 토마토 스튜와 나무도마 위에 곡물빵과 굵게 자른 치즈가 과일과 함께 차려져 있었다.

'유럽의 노부부가 먹는 아침 식사 메뉴 같다.'는 내 생각은 고정관념이었다. 마치 '할머니의 부뚜막'의 카페 같은 인테리어가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해진 틀 안에서만 정답을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등잔 밑의 소중한 기회들을 얼마나 많이 놓치며 살아가는가. 편견에 사로잡히면 좋은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고, 익숙한 것 너머의 새로운 지혜를 만날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하게 된다.

청국장 한 그릇을 먹기 위해 헤맸던 그 시간은 내 안의 낡은 고정관념 하나를 벗겨 내는 과정이었다. 뚝배기에 콜드브루 커피를 마실 수도, 무쇠 솥에서 티라미수 케이크를 꺼낼 수도 있듯, 내가 그어놓은 생각의 테두리를 허물 때 비로소 삶의 다채로운 면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