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김에 쉬어 가다
촉촉한 나무 숲길. 사사삭 하는 나무 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청설모 한 마리가 분주하다. 곳곳에 입을 벌린 밤송이와 낙엽이 지천인 걸 보니 풍성한 가을산이 청설모에겐 천국이겠구나.
찰칵! 순간을 담았다.
나는 다시 숲이 내뿜은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키며 한참을 걸어 올랐다. 이번엔 더 높은 곳에서 '사사삭 서억서억'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니. 키 큰 나무의 가지 사이를 다람쥐인지 청설모인지 모를, 아까보단 작은 녀석이 바쁘게 옮겨 다녔다. 그러다 툭! 하고 내 발 앞에 작은 밤톨 하나가 떨어졌다.
위치가 딱 거기였다. 내가 눈으로 좇던 귀여운 그 녀석이 옮기다 놓쳐 나한테 떨어진 게 틀림없다.
윤기가 맨들하게 나는 밤톨을 주워 들어 손으로 꽉 쥐었다.
"오! 럭키! 청설모가 실수로 흘린 밤톨을 만져보네. 요건 내가 가져야겠다."
몇 걸음 기분 좋게 걷다가 풀숲으로 휙 던졌다.
'자책하지 말고, 기분 풀라고 잠시 내게 온 행운인 건가? 눈으로 보고 만져 봤으니 충분하다.'
몇 시간 전의 나는 게으름을 피워 자책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운도 없지 하고 생각했었다.
화들짝 눈을 떠보니 '8시 39분'
'아... 나 진짜 뭐 하는 사람이야.'
오늘따라 혼자 준비하고 출근한 남편을 현관에서 배웅하고 침대로 다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아이들을 한 시간 뒤에 깨워야지 한 게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몇 번 알람을 끈 기억만 있고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아이들도 각자의 알람을 듣고 비슷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다 같이 꿀잠을 자버렸다.
나는 서둘러 아이들을 깨우고, 내 양쪽 눈꼬리가 당겨져 관자놀이에 닿도록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잡았다.
쿵쾅대는 가슴을 한 줄기 이성이 붙잡았다.
'늦기 전에 빨리 문자부터.'
나는 아이가 감기증세가 있어 병원에 들렀다 등교하겠다고 선생님들께 문자를 보냈다. 이대로 미인정지각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전부터 셋째는 감기가 꽉 들어 콧물이 나고 목이 잠겨 있었다. 그간 병원에 가자는 내 권유에, 빨리 밥 먹고 할거 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아 며칠을 약국 감기약만 챙겨주었었다.
막내도 어제 콧물이 계속 난다며 숙제를 하던 책상에 한 뭉치 휴지를 모아놓은 것을 내가 버렸다.
"병원을 들러야 해서 결국 가네. 어차피 감기약 지어야 했으니 잘된 일인가."
기어이 세 모녀가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게 생긴 아침,
시험을 이틀 앞둔 셋째는 6시에 잠들어 잠이 부족했단다. 아이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병원에 가기 전에 잠을 더 자겠다고 말했다.
"엄마! 나 아까 공부하다가 아침 6시에 누웠어. 잠 부족했으니까 오늘은 10시까지 잘게."
막내도 나만큼은 당황하지 않았다. 소파에 풀썩하고 자책하고 앉아 있는 나에게, 잠이 덜 깬 눈으로 잠시 기대어 있다가 말했다
"오늘은 머리만 감아야겠다."
셋째는 다시 자고, 막내가 씻는 사이에 나는 뒤늦은 아침을 준비했다.
부추를 꺼내 총총총 썰어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 숨을 죽여놓고, 간장, 고춧가루, 깨, 매실청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기름을 둘러 잘 달군 팬에 계란 한 개를 깨서 프라이를 했다. 가장자리는 튀긴 듯 바삭하게, 노른자는 반숙이 되게 익혔다. 넓은 볼에 밥을 적당히 퍼서 부추와 계란프라이를 얹고. 김자반과 양념장을 섞어 비빔밥처럼 비벼주면 끝.
씻고 나온 아이는 평소 때보다는 여유 있게 밥을 먹고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집 앞 소아청소년과에 진료접수를 하고 나는 덧붙였다.
"여기서 저도 진료받을 수 있나요?"
"물론이죠. 신분증 주세요, "
아이의 진료가 끝나고 나도 진료의자에 앉았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2주 전쯤 몸살과 기침이 심했는데 치료를 받지 않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졌는데, 그 이후로 계속 목에 가래가 낀 듯하고, 수시로 사레가 들리거나 잔기침을 하게 돼요."
항상 차분하고 친절하게 달래듯 진료 봐주시는 연세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셨다.
"상처를 다스려야 딱지도 앉고 낫듯이, 목도 관리를 해줘야 해요. 관리가 안 되어 목이 예민해져서 그래요. 그래서 찬바람이나, 먼지 등 자극이 들어오면 기침이 나는 거예요. 마스크도 잘 끼시고 약 잘 드세요."
늦은 김에 쉬어가는 셋째처럼, 나도 아이 따라 병원에 온 김에 진료를 받고 만성이 되어 가는 기침을 치료하게 되었다.
2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학교에 막내를 보내고 집에 가니, 셋째가 아직 자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야 하는데? 좀 더 자니까 괜찮아?"
"부족한 잠 좀 보충 됐어. 나 좀 이런 시간이 필요했어."
똑같은 메뉴로 다시 만들어 셋째도 식탁에 앉혔다.
"이게 엄마가 어젯밤에 말했던 새로운 레시피야? 맛있다. 다음에 코 안 막혀서 맛이 더 잘 느껴질 때 한번 더 먹고 싶어."
이번엔 셋째와 함께 같은 병원을 찾았다.
내 또래의 간호사분이 정말 활짝 웃으며 입구로 들어서는 나와 아이를 환영해 주었다.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이제 가요? 진료확인서 필요하죠. 온 식구가 감기에 걸렸나 봐요."
처방약을 받아 아이와 함께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 우리는 아찔한 아침상황에 작은 위안거리를 찾았다. 아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다들 학교에 있는 이 시간에 밖에 있는 기분 괜찮네. 오늘 늦잠 자서 정말 다행이야. 내일 1교시에 한 과목 시험 있는데, 시험날 이랬으면 어쩔 뻔했어. 엄마 정말 다행이지?"
"응. 너무 아찔해. 엄마가 내일은 정신 바짝 차릴게."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진 오늘의 에피소드였다.
괜찮아진 이유가, 청설모처럼 귀엽고 잔잔하게 나를 위로해 준 우리 아이들 덕분인지, 만성이 되어 가는 감기의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해 주신 의사 선생님 덕분인지,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환하게 웃어준 간호사분 덕분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청설모야! 네가 맛있게 먹으려다가 나무 위에서 아래로 떨궈서 놓쳤던 그 밤톨, 그 숲 어딘가에서 꼭 찾아서 네가 먹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