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명색이 작가시잖아요? 작가로서 취준생에서 한 말씀 해주시죠?"
한 대담 강연에서 반복해서 ‘작가시잖아요’로 시작되는 질문이 돌아오자, 갑자기 한 유명한 신문칼럼 제목이 생각나서 사회자에게 "작가란 무엇인가?" 라고 되묻고 싶어졌다. 그 작가가 도대체 뭐길래 나에게 특별한 역할을 자꾸만 요구하는 것일까?
사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조언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특히, 남보다 잠시 높은 강단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충고 따위를 던지는 것처럼 밥맛 떨어지는 짓도 없다. 하지만, (평소에 애써 숨기고 있는) 내 삐딱한 본심에 따라 맘대로 지껄였다가는 이 이벤트를 진행하는데 큰 노력을 할애한 주최자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나도 직장인이기 때문에 담당자들의 안위를 마음대로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 나는 속으로 울컥한 마음을 꾹 참고 "딱히 작가라기 보단, 취업과 퇴직을 해봤던 사람으로서…"라고 무난하게 지나간다.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공격들을 비스듬하게 빗겨 맞거나 흘리는 방법을 익힌 것은 지난 40여 년간 매번 늘려온 삶의 기술이다. 물론 행사 자체의 입체감과 선명도를 높이고자 했던 사회자분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물을 수 없다. 아마 별것도 아닌 일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내가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이것도 그냥 문맥에 맞춘 말 인 것 같다. 나는 책이란 것을 쓰기 전에도 원래 삐딱했으니 그저 삐딱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Writer)라는 것은, 사전적인 해석에 따라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통상적으로 통하는 의미는 단행본 서적을 출간한 경험이 있거나, 글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군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우리 사회에서는 ‘작가’에게 일반적인 직업 이상의 별도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같다. 특히 ‘출간 작가’에게는 돈벌이로서 계층을 만들어지는 직업 계층에서 떨어진 별도의 지식인과 같은 지위가 부여되거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희망, 즉 “나도 내가 쓴 책 한 권을 가져봤으면”를 이룬 사람이라는 열망의 층계 위에 서는 것 같다.
그러한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작가로서’ 무언가를 요구받는 상황은 그저 마음속의 우쭐한 기분을 촉매를 일으키는 정도로 활용하면 그만이지만, 반대로 나는 그보다 ‘작가’라는 지위에 동시에 요구되는 특정 ‘책무’에 불만을 가진다. ‘작가로서’라는 직업적 지칭이 ‘책을 쓴 사람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서 ‘나름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혹은 ‘남보다 조금 나은 사람으로’ 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에 반발심이 든다는 것이다.
미국 작가 줄리아 카메론이 본인의 저서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우리는 작가가 되는 일에 터무니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말을 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글을 쓰는 것이 대단한 일인 것처럼 티를 낸다”
나 또한 그러한 시선에 동의하는 바인데, ‘작가들을 무슨 대단한 인간이라도 되는 냥’ 바라보는 외부적인 시각도 불편하지만, 스스로를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부 작가군의 자기 인식도 불만이다.
그리고 간혹 스스로를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타인에게서 소개를 받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소개하는 것은 정말이지 작가 군에만 있는 이상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천 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든 영화의 감독이 “안녕하세요! 천만관객 감독 누구누구입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인기가수 누구누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뭔가 다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는 감독이나 가수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소개할 때 ‘작가’라고 소개를 하는 것 보다 그저 <ㅇㅇ의 저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거나,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할 뿐이다.
사실 ‘작가가 무엇인지’를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글을 써서 책을 펴낸 사람이라는 결과의 지위가 아니라, 무언가 쓰고 있을 때면 얻을 수 있는 과정의 지위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반대로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다면 그는 작가라는 지위를 이어가기 힘들다. 그래서 이 작가를 유지하게 위해서는 최소한의 글을 쓸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 요소로 꼽힌다.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그 글쓰기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달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하나의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완벽이나 완성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다. 단지,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특정 작품을 마감하는 일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들은 항상 좌절과 실패를 안고 산다. 그래서 이어령 선생님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표현했고, 월리엄 포크너 또한 “우리 모두는 우리가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우리를 한다”라는 역설적인 말을 남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결과적으로, 이 좌절과 실패를 취미 혹은 특기로 삼지 않으면 결코 이 작가 생활을 유지하고 살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로 계속 살기 위해서는 마조히스트 같은 피학성애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실패로부터의 학대’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즐기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렇게 나는 또 이 자기파멸적인 작업을 위해 작업대에 앉아서 무언가 새로운 실패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적어도 작가들은 파괴와 공포를 자기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를 ‘내 스스로 지핀 불에 데었다’고 표현했듯이, 스스로 지핀 불이기 때문에 아프고 괴로워도 남탓을 할 수는 없다.
봉준호 감독은 한 강연에서 “공포의 근원은 집착이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영화 창작자는 찍고 싶은 어떤 장면을 소유하는 시점이 올 때까지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는 것. 왜냐하면 그 장면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작가들도 다른 창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무언가의 집착을 해소하기 위해 실패라고 뻔히 보이는 운명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난 전에 브런치에도 분명히 밝힌 적이 있지만, 전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능하면 이 짓도 속히 때려치우고 쓰는 자가 아닌 ‘읽는 자’로만 남고 싶다. 나는 생각보다 꽤 괜찮은 독서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언가를 쓰는 일을 (지금처럼) 계속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쓰는 일이 내가 내 인생에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나 나름대로의 답변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저 지 꼴리는 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바로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