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미 글러먹었지만 말이다
지난 4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변화무쌍한 시기였다.
평범한 직장인, 선량한 척 사는 서울시민, 흔한 남성 육아휴직자라는 기존에 타이틀을 벗어나, 작가 혹은 강연자, 칼럼리스트, 자문위원, 심사위원 등의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을 달고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나오면서부터다. 2011년에 첫 책을 출간하고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뒤에, 그리 큰 기대를 안 하고 겨우겨우 꾸역꾸역 만들어 낸 그 책 말이다. 물론 이 책의 뜻밖의 성공으로 생겨난 변화를 평소에 원하지 않던 바가 아니었지만 그 변화가 너무 갑작스럽게 이뤄졌고, 폭과 속도가 너무 가팔랐다. 게다가 변화가 시작되었던 시기에 나는 회사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삶에 지쳐,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매일 아이를 돌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날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은 배우 류승수 씨가 mbc <라디오 스타>에서 날린 명언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이상과는 정반대로 ‘모두가 나를 알아보는데 돈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하긴 했다 ㅎㅎ) 물론 지금의 시대에는 소위 '셀럽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류승수씨와 마찬가지로 '돈은 필요하지만, 이름은 알리고 싶지 않은' 삶의 방식을 꿈꿔웠고, 원래 쓰려고 했던 에세이의 제목도 <아무도 날 모르고 돈만 많았으면>(이하, 아몰랑돈)으로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금 나의 현생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아몰랑돈>의 삶을 이루기에는 애초에 글렀다는 생각이다. <아몰랑돈>의 핵심은 ‘아무도 날 모른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애초에 철저한 신비주의를 택해야 했던 것이다. 10여 년 전에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사용했던 ‘편집왕’이라는 필명을 그대로 썼으면 깔끔했을 터인데, 첫 책이 나왔을 때부터 본명과 필명을 병기하는 바람에 이미 애초에 글러먹은 것이지.
<아몰랑돈>의 삶을 진심으로 실천하고 있는 작가로는 고토게 코요하루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귀멸의 칼날> 일명 ‘귀칼’로 전 세계에서 1억 부 이상 만화를 판매한 작가 고토게 코요하루(필명)의 경우는 본명과 얼굴, 혼인 등 기본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별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경우이다. 그저 자신의 캐릭터로 악어를 쓰기 때문에 '악어 작가(ワニ先生)' 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소위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몇몇 작가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신비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는 결심은 굉장히 흔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 결심의 토대에 균열을 내는 가장 큰 함정은 아마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숨어 있는 그놈의 “인정 욕구”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이 바로 나의 작품이라고요!!” “내가 이렇게까지 잘 나가고 있다고요, 이제는 저를 인정해주시라고요!!”라고 문장이 항상 목구멍 뒤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마 이 우리 인간의 저주받은 ‘인정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본 욕구를 이겨내는 것은 초인간적인 의지 혹은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는 결국 이래저래 핑계는 가득하지만 그 인정 욕구를 이겨내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현실적인 이득도 무시할 수 없다. 대중들이 특정인을 대할 때, 알려진 이름(유명)의 강점은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아마 나의 이력 중에서 “잘 팔린 책 한 권”이 없는 상태에서 강연이나 대중 앞에 섰다면 나는 십중팔구 듣보잡 취급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를 듣보잡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는 것이다. 그 유명세의 후광효과는 “이 유명한 사람의 기본 인성은 나쁘지 않을 거야”라는 기본 디폴트 세팅으로 사람들이 다가오기 때문에, 호감 또한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실제적인 이득이 있음을 알기에 스스로 유명세를 포기하는 일은 어렵다.
나는 그러한 면에서 애초에 위의 귀칼 작가님처럼 <아몰랑돈>의 삶은 애초에 망해버린 것이다. 내가 망했다고 말하는 의미가 첫째로는 수십수백억에 달하는 1차 저작권료와 2차 저작권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아무도 날 모르는 상황을 이루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아몰랑돈>의 기본 취지(?)와 의지만큼은 죽는 날까지 유지할 수는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나는 내가 쓴 한 작품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뿐 (물론 사람들이 그 작품을 좋아하고 추앙한다기보다는, 그 작품의 제목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주목도는 아직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계속 지금 정도의 균형을 유지하기만 한다는 이 삶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간혹, 내 주위에 있는 지인 몇 분들은 나를 유명인인 것처럼 치켜세워주기로 하지만, 내가 내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자면 그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다고 플랜카드가 붙은 예전 깡시골의 고등학생 정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라는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저 그 가족들과 친한 동네 몇몇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몰랑돈>의 삶이 불가해진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비유명세>와 <돈>을 적절한 방식으로 조절하여 살 수 있을 뿐이다. 먼저, 지금 얻은 유명세를 통해서 돈을 버는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ㅇㅇ의 저자>로 사람들이 부르는 좋은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한두 번쯤 TV 프로그램에 나간다고 해서 길거리의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헐적인 TV 프로그램 출연도 기회가 되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넘어서기 위해서, 스스로의 레드라인은 설정해야 할 필요는 있다. 가령,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에 섭외를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는 정규 패널 등은 피할 필요가 있다. 만약 방송이 나의 개인 저작 활동이나 가족과의 삶을 넘어서면 나의 기본적인 생각과는 그 길을 넘어설 것이다. 난 이 이상의 레드라인만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균형만은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하나는 지금의 분수를 잊지 않는 것이다.
가끔 강연 자리에서 기업의 사장님들과 차를 마시고, 전국의 지자체장분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시간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그들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맡은 잠깐의 역할이 그러할 뿐이다. 주위의 분위기로 인하여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나는 순식간에 나락의 길을 걷게 되겠지.
그저 지금 이 정도의 시간이 좋을 뿐. 적당히 노력하고 적당히 벌고, 여전히 아무도 날 몰랐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