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툴리>리뷰

by 김현임

너저분한 집안, 이미 애가 둘인 상황에서 원하지 않았던 셋째 임신, 그리고 출산. 영화는 마를로(샤를리즈 테론)의 지긋지긋한 육아 일상을 ‘그저’ 보여준다. 한밤중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잠에서 깨 비몽사몽 간에 젖을 물린다. 영화 초반, 그렇게 계속되는 한밤중의 젖 물리기는 빠른 편집으로 나열되고 마를로의 몰골은 산 송장이 된다. 남편이 마를로에게 묻는다. “당신 괜찮아?”

마를로의 남편은 흔한 독박육아 스토리처럼 무능한 악역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영화는 가치판단과 선악을 두지 않는다. 남편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늘어난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가장으로 비춰질 뿐이다. 인물 간의 대사 역시 특별한 어조는 없으며 육아에 치여 말꼬투리 잡아 싸우지도 않는다. 엄마는 싸울 기운이 없다. 특별한 장치 없는 서사. 그러나 보는 관객은 알 것이다. 행간의 의미를.

육아의 일상을 ‘그저 보여주는’ 덕분에 뼈 때리는 육아의 현실을 지켜보는 내내 구역질이 올라온다. 때론 현실이 영화보다 무서운 법이다. 이 영화를 두고 혹자는 ‘육아 호러물’이라는 새 장르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매일 육아와 집안일에 치여 자신을 돌볼 틈이 없는 마를로지만 “당신은 좋은 엄마네요”라는 말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에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 대답한다.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에요.” 남편은 줄 젖이 없으므로 아기가 울어도 잠에서 깰 필요가 없는 게 당연하듯, 마를로 자신도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당연하다.

그런 그녀에게 친정 오빠의 출산 선물, ‘야간 보모’ 툴리(메켄지 데이비스)가 찾아온다. 아기가 잠드는 시간에 찾아와 엄마의 수면을 돕는 것이 그녀의 일. 한밤중에 아기를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 영 달갑지 않았던 마를로는 푸석해진 얼굴로 정신 줄을 놓기 직전에서야 전화기를 든다.


마를로는 툴리의 도움으로 점차 생활에 활기를 되찾아 간다. 툴리가 마를로에게 해주었던 일은 밤새 아기를 돌보아 주는 일, 컵케익을 구워준 일, 눈에 거슬리지만 닦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바닥을 닦아 준일 등이 전부다. 물론, ‘그게 전부’라고 치부하기에 쉬운 일들은 아니다. 어려운 일이다(우리는 집안일에 쏟는 에너지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무기력과 우울증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남편조차 시도해보지 않았던 그 간단한 해법을 툴리가 해낸다. 그 작은 변화 사이에서 마를로는 생기를 되찾아 가는 듯 보인다.


그렇게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던 어느 날, 돌연 툴리가 보모 일을 그만둘 것을 알린다. 아기가 잠든 사이 몰래 빠져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 밤. 아직은 툴리가 더 필요했던 마를로는 애처롭게 매달리지만 툴리는 단호하다. 툴리는 보모 이전에 자신의 삶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마를로는 툴리를 향해 외친다. "그래 꿈이 있겠지, 그러다 쓰레기차처럼 30대가 올 거야. 그 앙증맞은 엉덩이는 출산할 때마다 불어나겠지, 지금의 그 자유로운 영혼도 끝이 나고, 외모도 추해질 거야.”

악다구니를 쏟아붓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마를로는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맞는다.


남편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병원에 도착한다.

“부인께서 이전에 정신질환을 겪은 적이 있나요? 과로와 수면 부족 증상을 보이고 있어요.”

남편은 의사의 말에 충격받는다. 야간 보모를 들인 후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야간 보모를 들인 후 저렇게 잘 지내는 걸 본적이 없거든요. 저렇게 음주운전까지 할줄은 몰랐어요. 애 보는 사람도 없는데 말도 없이 외출하고.”

의사가 다시 묻는다.

“그때 당신은 집에 있지 않았나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완벽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더군다나 애 셋을 엄마 혼자 키우는데 모든 것이 괜찮은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남편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수속을 담당하는 간호사가 남편에게 묻는다.

“아내 분 결혼 전 이름이 어떻게 되죠?”

“툴리에요. T,U,L,L,Y.”

이 모든 선물은 마를로의 스트레스가 빚어낸 환각이었다. 툴리는 마를로 자신이자, 마를로가 불러낸 가상의 멘토였다. 벼랑끝에 몰린 그녀 스스로 창조한 가상의 인물로 인해 위로받고, 위로했던 날들.

사고 직전 마를로가 툴리에게 쏟아낸 말은 결국 20대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마를로가 영화 속에서 남편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장면이 있다.

“다른 좋은 아빠들이 그렇듯, 그이도 좋은 아빠예요. 퇴근하면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책을 읽어주죠. 그리곤 잠들 때까지 좀비 죽이는 게임을 하는 게 낙이에요.”

그러나 이걸로 다가 아니었다는 것, 남편은 몰랐다. 이 정도면 그래도 좋은 아빠라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마를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왜 자신만 끊임없이 전쟁 같은 육아와 살림에 잠식되어 불어난 몸과 엉망인 몰골로 살아야만 하는지. ‘그래도 그는 좋은 아빠야’ 혼잣말 같은 넋두리로 현실을 모면했을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빠져있다. 좋은 아빠가 좋은 남편은 아니라는 것. 그런데 정말, 퇴근 후 숙제를 봐주고 책을 읽어주는 것 만으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건가? 그 단순한 간편함. 좋은 아빠 소리듣기는 참 쉬운일이다.


예민한 감각 때문에 문제아 취급을 받는 둘째 아들을 두고도 남편은 그저 ‘독특한 아이일 뿐이야,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 괜찮음 사이에서 마를로는 셋째를 짊어지고 학교에 불려 다니며 상담을 받고, 형편이 안 되는 와중에 개인 교사를 붙일 것을 권유받으며, 결국 다른 학교로 옮겨가는 과정을 치렀다. 그렇다. 남편은 늘 괜찮다. 엄마가 다 하니까.

마를로는 스트레스에 못 이겨 환각 증상으로 만들어낸 멘토를 앞에 두고도 남편을 걱정했다.

‘남편의 육아 스트레스’를 걱정했으며, ‘성적 욕구’를 풀어주는 것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그 와중에 말이다. 혼자 떠안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마를로는 툴리와의 첫 만남에 이런 말을 했었다.

“미안해요, 남에게 보살핌 받아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병실에 누워있는 아내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남편은 속죄한다.

“일에 애들에 치여서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어, 너무 미안해. 나는 당신이 다 잘하고 있는 줄 알았어.”

“나 잘하고 있었어. 나 잘하지 않았어?”

“아니, 그건 됐어. 그런 식으로 잘하는 거 원하지도 않아. 난 그저 당신이면 돼.”


영화는 여기서 서둘러 결말을 맺는다. 여전히 따뜻한 색감으로. 홀로 설거지 하는 마를로의 곁에 남편이 다가선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엔딩이지만 어쩔 도리없이 현실적인 결말이다. 갑자기 남편이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애가 갑자기 혼자 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둘째 아들에겐 개인 교사가 필요하지만 돈이 없어 유튜브에서 “좋다더라”하는 민간요법(몸에 천천히 솔질을 해주는 일, 영화 오프닝에서 보여주는 이 뜬금없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설명된다)만을 해줄 뿐이다.

이건 도대체가 애초에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영화다.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육아는 판타지가 아니니까.


미국에서 만들어진 육아에 관한 영화이지만 어쩐지 위화감이나 문화차이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미국이든 한국이든,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엄마는 늘 죄인이다. ‘그래도 엄만데’, ‘애 엄마가’로 시작하는 온갖 지적질을 피해 커피라도 한 잔 마실라 치면 노키즈존의 등쌀에 갈 곳도 없다. 이런데, 굳이 애를 낳아 길러야 할 이유가 뭘까? 출산 후 다시 일을 시작하기는 왜 그렇게 힘들며, 복직이 돼도 탕비실에 숨어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은 늘 엄마여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에 비해 엄마가 잃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과연 엄마를 위한 나라는 존재할까? 있다면 제발 알려주길 바란다. 그땐 ‘그래도 애는 낳아야지’하는 얘기에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할 수 있을 테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적인 리뷰: <리틀 포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