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를 가볍게 제친 내 마음속 일 순위
‘믿보황’이 나오지 않는 이상, 공중파 드라마는 아무리 ‘태양의 후예’라 할지라도 보지 않기에 이르렀지만 금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단 하나의 드라마가 있었으니.
오늘은 JTBC의 금토 드라마 <욱 씨 남정기>의 ‘잘 만들어짐’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아무리 잘 나간다 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붙여놔도 연출이 부실하면 김이 빠지는 게 드라마다.
이의 아주 좋은 예가 공중파의 수목 드라마가 아닐까. 도무지 연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정서의 공중파 드라마는 그러므로 빠짐없이 ‘삼각관계’가 존재하며, 고구마 같은(고구마가 얼마나 훌륭한 작물인데 답답함의 대명사가 되다니, 호박고구마!) 전개를 자랑한다.
학교가 배경인 드라마는 학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회사가 배경인 드라마는 사내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로 축소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리얼하게 묘사한 <미생>은 공중파 드라마에선 충족되지 못하는 답답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었다.
처음 <욱씨 남정기>의 티저를 보고 복사기 앞에서 한껏 찌질한 모습으로 참을인을 카피해대고 있는 윤상현의 모습과 이를 매섭게 노려보는 이요원의 모습에서 회사가 이야기의 배경이라는 것을 알아챈 뒤, 부디 이 드라마는 공중파 드라마의 그것과는 다르길 바랐다.
달랐다. 조심스럽게 첫 화를 시청한 나의 만족감은 다음 시리즈를 정주행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욱씨남정기에서 크게 화두로 삼는 ‘갑과 을’의 행태는 크게 ‘황금화학’과‘러블리 코스메틱’의 대립으로, 다시 ‘김상무’와 ‘이요원’의 대립으로, 세부적으로는‘러블리 코스메틱’ 안에서의 대립, 그러니까 을 안에서의 또 다른 갑을의 대립으로 전개된다.
이 부분이 공중파 드라마와 판이하게 다른 욱씨남정기의 연출이다.
이 드라마가 공중파에서 방영되었다면, 이요원과 윤상현의 러브라인이 두 번째 화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을뿐더러, 갑을의 부당함은 황금화학의 김상무가 러블리 코스메틱에 취하는 액션으로만 부각되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또한 러블리 코스메틱 안의 조연(조동규 사장, 한영미 과장, 박현우 대리, 장미리 디자이너)들의 역할은 그저 커피 마실 때나 등장하는 동료 1, 동료 2에 불과했을 것.
욱씨남정기엔 조연이 없다. 옥다정(이요원)과 남정기(윤상현)의 역할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때문에 점심시간에 잠깐 얼굴 한번 비추면서”오늘 점심 메뉴는 뭐에요?”따위의 아무짝에 쓸모없는 씬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캐릭터 하나하나에 실제 직장생활에서 그들 각자의 직급마다 겪는 애환과 에피소드들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 어느 역할 하나 가볍게 지나칠 수 없도록 짜여 있다. 더불어 ‘동룡이 아버지’, 사장 조동규 역을 분한 유재명의 베테랑 감초 연기 역시 매 회를 거듭할수록 맛있다. 허당끼 충만한 사장님이지만 파란 추리닝 속에 감춰져 있던 훤칠함이 의외의 수트핏으로 빛을 발한다.
욱씨남정기의 잘 만들어짐은 매 화의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과 추행을 묘사한 지난 8화와 워킹맘의 애환을 담은 9화는 이미 을의 자격이 충만한 하청업체 직원들이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을로서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러블리 코스메틱 안에서 벌어지는 을들의 연대. 8, 9화에서 장미리와 한영미의 에피소드가 주였다면, 박현우의 에피소드는 이 사이에 슬며시 녹아들어있다. 아직 학자금 대출을 채 갚지 못한 대리급 사원, 얼핏 한 번씩 등장하는 그의 원룸은 정말 우리 흙수저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맞벌이 워킹맘의 고충은 ‘진짜’를생생하게 담아내 워킹맘들이 감복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
코딱지만 한 방 두 칸짜리 아파트지만 아직 중도금도 채 갚지 못한 맞벌이 가정인 한 과장.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시어머니가 돌보아 주고 있지만 매일 같은 야근에 어머니 비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어김없는 야근에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집안. 집안 곳곳에 널린 옷가지와 살림, 쌓여있는 설거지 그릇을 무심한 눈길로 훑는다. 식탁에 남은 잔반을 바락바락 한 그릇에 모아 담아 찬밥에 비벼 입안에 욱여넣으면서 뱉는 말.
“나쁜 놈. 직장은 너만 다니냐.”
애보기에 이력이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화가 나 돌연 지방으로 내려간다. 직장에서 받은 난데없는 전화에 한 과장은 우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회식이 있어 퇴근 못하니 알아서 하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하필 신제품 출시로 야근을 해도 모자란 때이지만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찾으러 간 한과장은 이미 훌쩍 지나버린 하원 시간에 선생님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고 만다. 여전한 집안 꼴. 아이를 재우고 집안 정리를 하던 한과장은 뒤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이건 아니지 않느냐며 화를 낸다. 애는 혼자 낳았나. 하지만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차라리 사정 모르는 생판 남의 것과 다름없다. “너는 직장 생활하는 여자가 회식도 이해를 못하냐”, “솔직히 말해 애를 우리 엄마가 키웠지 니가 키웠냐”, “겨우 그거 번다고 유세 부리는 거냐, 이럴 거면 회사 때려치워라, 너는 엄마 자격도 없는 여자다” 정말 어마어마한 폭언이다.
보는 입장에서는 저런 공 없는 결혼생활 굳이 이어나갈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이혼을 했으면 좋겠다 싶지만 부부싸움에 울음이 터진 아이를 끌어안고 잠이든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 다시 지긋지긋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워킹맘의 모습이 실제 그들의 날것과 다름없는 일상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앞으로 종영을 6화 남짓 남겨두고 있는 욱씨남정기에도 연출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미리의 성추행 장면을 암시하는 카메라 컷에서 엉덩이를 간신히 가린 핫팬츠를 입고 온 장미리의 하반신이 등장한다. 평소엔 입지 않던 핫팬츠를 성추행장면을 위해 굳이 입혔을 것이란 추측과 함께 그렇다면 옷이 짧은 여직원의 몸은 함부로 추행해도 가해자는 할 말이 있다는 당위를 지적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 사실 직장이건 어디건 여성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 남성들에게 치마 길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어린 여자니까 함부로 대하고 결혼한 아줌마니까 함부로 대하고, 그냥 여자니까 함부로 대하는 그 태도가 모든 추행의 시작일 뿐.
이 의문스러운 연출 뒤 장미리는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계속해서 쉴드를 치는 신팀장에게 결국 더러운 꼴을 당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박대리의 증언 덕분에(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박대리 역시 한낱 힘없는 일개 사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갑질하는 상사의 협박 앞에 자유롭지 못했던 것. 오히려 백마 탄 기사처럼 단박에 사건을 해결해주는 드라마틱한 연출보다 현실적이다.) 사건을 수면 위로 올려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내지만 정말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친 가해자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 후에도 계속되는 신 팀장의 폭언은 끝나지 않는 사내 성추행의 고리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비록 아쉬움이 담긴 연출이었지만 화두는 정확히 짚어냈다.
이렇게 드라마이지만 ‘드라마틱’하지 않은 욱씨남정기가 좋다.
더군다나 이 드라마의 현실성이 장점이라면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코미디’다.
연출상 재미를 위한 요소 그러니까 제작자와 시청자 서로 간의 ‘이 정도는 괜찮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질 만한 선의 코믹 요소들을 제외하고 이 드라마에 억지스러운 과장은 없다. 오히려 열이 잔뜩 오른 이요원의 뒷모습에서 불길이 치솟는 CG라든가 윤상현의 심리적 압박을 묘사하기 위해 저 멀리서 날아온 로봇의 주먹에 어퍼컷을 맞아 날아가는 연출은 욱씨남정기의 코믹 요소에서 빠질 수 없는 MSG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이렇게 을들의 현실을 손 안 닿는 등허리를 대신 긁어주듯 시원하게 짚어주고, 적절한 코믹 요소까지 버무려 주니 시청률은 나날이 신기록을 경신할 수밖에.
이것이 왠지 모르게 그들만 심각해 보이는, 정황상 긴박한 씬이지만 어쩐지 하나의 긴장감 없이 간지러운 대사만이 남발하는 ‘태양의 후예’보다 ‘욱씨남정기’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이유다.
두고두고 아껴보고 싶은 을의 연대기는 이제 6회 남짓 남았다.
욱씨남정기에 나온 주옥같은 대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를 남겨두며 오늘의 리뷰를 마친다.
‘우리 같은 을끼리는 이러지 맙시다.’
욱씨남정기는 매주 금토 8시 30분에방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