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에 가까운 십대의 사랑이야기
영미문학에서 아니면 영미권 영화에서 <폭풍의 언덕>은 아주 심심찮게 인용된다. 아니 대체 그들에게 이 오랜 책이 어떤 의미 이길래 숱한 베스트셀러와 영화에서 이렇게들 언급을 해대는 걸까 하고(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에서 조차 여주인공이 얘기하길, "난 매년 크리스마스엔 <폭풍의 언덕>을 읽어"라고도) 나는 표지만 보아도 재미없음이 뚝뚝 묻어날 것만 같은 이것을 기어코 이틀 밤새 읽어내고야 말았다.
분명 고전은 '재미'로 읽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에밀리 브론테의 어색한 문장체(번역체를 감안하고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읽히지 않는 문장이 더러 있다. 알고 보니 이 부자연스러움에 대해서는 소설가 서머싯 몸도 지적한 바 있다)를 감안한다 손 치더라도 분명 이 엄청난 서사를 장장 오백여 페이지가 넘도록 이끌어 내는 스토리라인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각각의 캐릭터, 대를 이르는 절절한 복수극,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 인물에 대한 강렬한 인물 묘사는 다시금 이 책이 쓰인 연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히스클리프의 대를 거듭한 복수극 덕분에 그 이름이 단연 두드러지지만 지금 우리의 <응답하라 1988> 시리즈의 인물들처럼 <폭풍의 언덕>에 조연은 없다.
소설가 김연수는 <폭풍의 언덕>을두고 "<폭풍의 언덕>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도입부의 목소리(록우드의 꿈에 나타난 캐서린 린튼의 목소리)에전율하지 못하고 이십 대가 됐다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십 대 시절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소설이니까."라고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나는 슬픈 이십 대를 맞이했음에 틀림없다. 내일모레 서른을 앞둔 지금에서야 읽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캐서린의 열병을 어린애의 치기라고 치부했던 것일까? 사실 그녀의 열병엔 다소 억지가 있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이 그토록 한 사람의 생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에드거 린튼이 아닌 그를 선택했어야 했다. 사랑은 영원히 히스클리프와 하지만 결혼은 에드거와 해놓고 에드거의 질투를 스트레스로 느끼며 정신착란 증세를 겪을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히스클리프와의 만남을 저지하는 남편의 행동에 스트레스로 졸도하는 연기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화를 못 이겨 정신착란 증세를 끝으로 요절하고 만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내의 옛 연정이 아직도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않고) 돌연 다시 나타나 그녀를 유혹하려 드는데 어떤 남편이 이를 가만히 두고만 보겠는가. 에드거의 이런 행동을 이해 못하는 안하무인 캐서린은 자신의 옛사랑을 두둔하다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랑의 열병 사건'의 최대 피해자
사실 린튼 집안의 자제들이야 말로 이 '사랑의 열병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 수 없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을 접지 않은 채 에드거와 결혼한 캐시로 인해 언쇼집안과 린튼 집안의 길고도 부도덕한 악연은 시작된다. 사랑하는 캐시를 에드거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히스클리프의 복수심과 증오는 에드거가 홀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의 극악무도한 복수극에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캐시가 졸도로 떠나기 전 그녀의 뱃속엔 아기가 있었다. 캐시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으로 출산을 했고, 결국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둔 것이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의 딸이 애달플 리 없다. 그에겐 아기마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자 또 다른 복수의 대상일 뿐. 그는 에드거의 유일한 삶의 낙인 딸마저 복수극에 끌어들인다. 상황은 더 나빠진다. 아내를 잃고 폣병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남겨둔 에드거에게 떨어진 최후의 통첩은 히스클리프와 사돈이 되는 것.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결국 캐시의 딸을 자신의 혈육과 강제로 결혼시킴으로써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사실 히스클리프의 복수에서 묘사되는 히스테릭함은 캐시의 무덤을 파헤쳐 옮기는 것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발상이 아닌가. 아무리 인생을 다 바쳐 사랑했다지만 망자의 유골을 꺼내 소유하려 드는 이 대목은 그의 괴기에 가까운 히스테릭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평생 캐시만을 사랑한 그에게, 그래서 이토록 기나긴 복수의 여정을 이끌어온 그에게 숨겨둔 아들이라니, 놀랍게도(아니 이 이상 놀랄 일도 없겠지만) 에드거의 하나뿐인 여동생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의 본성을 알아채고 그에게서 도망쳐 나올 때 홀몸이 아니었다. 에드거를 미치게 할 속셈으로 마음에도 없는 이사벨라를 유혹해 결국 결혼에 이른 히스클리프는 정서적 학대 속에서 그녀를 임신시킨 것이다. 도망쳐나오는 순간까지 몸이 성하지 않았던 이사벨라는 결국 홀로 병약한 아들을 낳았고, 이 사실을 편지로 친정에 알린다. 히스클리프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하던 오빠 에드거의 만류에도 극구 집을 떠난 이사벨라는 차 마옛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아이가 열두 살쯤 되던 무렵 세상을 떠난다. 이 사실을 안 히스클리프는 에드거에게서 여동생의 흔적인 조카마저 앗아내고 만 것이다.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그 아이의 이름은 ‘린튼’. 축복받지 못한 아이들의 운명은 이름으로 점철되고 만 것일까, 캐시의 딸 역시 엄마의 이름 그대로 물려받은 ‘캐서린’이다. 이렇게 캐서린과 린튼은 히스클리프가 일군 복수의 성지, ‘위더 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에서 강제 결혼을 당하고 만다.
복수의 끝
히스클리프의 복수극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헤어 튼’을 얘기하지 않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없다. 그가 위더링 하이츠를 떠날 무렵, 그러니까 그에게 불타는 복수심의 불씨가 된 ‘힌들리’의 아들이 바로 ‘헤어튼’이다. 히스클리프는 어린 시절 힌들리에게 받은 학대를 이 집안에서 다시 그대로 재현해낸다. 그렇게 헤어튼은 캐서린과 린튼보다 가장 먼저 복수의 타깃이 되었고 히스클리프의 힌들리에 대한 복수심을 물려받은 채, 태어난 순간부터 히스클리프의 학대 속에서 자란다. 린튼집안의 후손이지만 하인들과 함께 지내고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며, 거칠고 천한 모습으로 자라는 그를 보면서 히스클리프는 복수의 첫걸음을 밟아 나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헤어튼의 눈에서 캐시를 본다. 헤어튼의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모습에서 히스클리프 자신을 본다. 인생을 다 바친 거대한 서사가 마무리될 무렵 그에게 허무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뜻대로 위더링 하이츠를 힌들리에게서 앗아내고, 그의 아들마저 이 집안의 하인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에드거 와캐 시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에드거의 유산마저 거머쥐었지만 그 끝에 남은 것은 만족이 아닌 공허였다. 히스클리프가 캐시와 마찬가지로 정신착란을 겪다 홀로 싸늘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복수극의 어린 두 희생양인 캐서린과 헤어튼이 새 출발을 기약하면서 이 기나긴 치정극은 끝이 난다.
과연 처음 이 책을 읽기로 했을 때의 결심은 <폭풍의 언덕>이 왜 영미 문학권에서, 하다 못해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여주인공 대사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인용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내자는 것이었지만 글쎄,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고전의 이름을드높일 작품이라고는 느끼지 못하겠으나, 1800년대 중반의 영국인들에게는 가히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것임은 짐작할 수밖에 없다. 소설가 김연수의 말처럼 <폭풍의 언덕>은 ‘막장 드라마’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현대판 막장 드라마라는 것들은 정말로 <폭풍의 언덕>을 뛰어넘지 못하고 아직도 19세 기판 버전의 영향 아래 머물러 있다. 아, 그렇다면 정말로 세계문학전집에 꼽힐만한 ‘고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수긍이 간다. 뭐든 처음은 오래 기억되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