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 제철소, 코난북스라는 세 출판사가 공동기획으로 함께 펴내는 책이 있다. ‘아무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라는 기획 의도로 나오고 있는 책들이다. “먹고사는 일 이외에 인생에 무해한 딴짓, 딴생각 등 단순한 취미 이상의 썸띵을 가지고 단단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기획 의도로 나오고 있는 인디고(글담)의 에세이 시리즈 ‘딴딴’도 있다. “단순한 취미 이상의 썸띵”이나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늘 감탄하는 한 가지가 있다. 양말, 서재, 문구, 잠, 비건 베이킹, 주말의 캠핑, 검도… 그 대상이 무엇이건 그것에 관한 확고한 취향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말)목이 너무 쫀쫀하지 않아야 하고, 검거나 짙은 색상은 왠지 부담스럽고, 길이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양말이 좋다”거나 “내가 먹는 즐거움보다 만드는 즐거움이 더 큰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양말’이나 ‘베이킹’에 관한 나름의 기준과 취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는 아니더라도 그러한 고유한 ‘내 기준’이 생길 만큼 생각한 시간이 많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그런 삶의 취향이 담겨 손에 꼽은 책 중 한 권이 ‘지속가능 디자인 연구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박규리 작가의 《아무튼, 딱따구리》이다. 책에 일가견이 있는 후배가 선물해서 읽게 되었지 솔직히 ‘웬 딱따구리?’ 하며 모르고 지나칠 뻔한 책이다. 작가의 남편은 영장류학자 김산하 박사로 두 사람은 “각자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일을 하며 먹고산다”고 말하는 부부다. 이들 부부가 강릉 단독주택가의 월셋집, 영국 케임브리지의 작은 이층집, 서울 구로의 낡은 5층짜리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다니다 그 세 곳 모두에서 딱따구리 소리가 들리는 우연을 발견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딱따구리 덕후의 딱따구리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나서도 ‘내가 지향하는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삶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기준과 견해를 찾아내는 것이 곧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에 무심하고, 제 삶의 의의나 가치를 파악하는 일에 무지하다. “사람들”이라고 할 것 없이 나부터 그렇다.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중요하게 지향할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찬찬히 고민해 보지 않은 탓에 ‘내 마음 나도 몰라’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야말로 ‘느낌적 느낌으로 아는 나’라고나 할까.
1인 가구의 삶은 마치 미성숙한 개인이 자의식을 갖춰 가는 일 같다. 내 경우는 30대 후반 늦은 나이에 급작스러운 이직과 함께 상경하며 1인 가구의 삶이 시작됐다. 적지 않은 나이에 한 독립인데도 ‘나, 생활부적응자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결혼이나 출산, 양육 같은 인생의 이벤트들은 어느 측면에서는 한 개인의 성숙도에 깊이와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는 일들이다. 보통은 그런 일들로 온갖 ‘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겪으며 ‘어른’이 돼가는 것 같다. 물론 그런 경험이 무조건 긍정의 힘을 발휘해 사람을 성숙의 길로 이끄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단 상식을 넓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그런 강렬한 이벤트 몇 가지를 거치지 않고 건너뛴 독신의 사람이 그나마 거치는 삶의 이벤트 중 하나가 ‘독립’이다. 계약서에 도장도 찍고 부동산도 드나들고 동사무소나 의료보험 공단, 세무서도 드나들고 시장이나 마트, 가구점도 드나들며 ‘사는’ 일과 연루된 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자의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고민한다고 능숙해지는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매번, 허둥대고 넋이 나가버리기 일쑤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하는 일을 하나둘 만나게 되니 그렇다.
불행히도, 선택과 결정의 순간 앞에서 허둥대고 갈피를 못 잡을 때마다 나는 왜 이 나이 먹도록 뭐가 이렇게 매번 서툴고 어렵냐며 머리를 싸매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무튼, 딱따구리》를 읽을 무렵은 마침 고향인 대구로 돌아와 이제야말로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지 제발, 정리 좀 해보자고 되뇌던 때다. 그래서 더더욱 박규리 작가의 “우리는 정다운 물건으로 채워진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원했다”는 간결한 메시지가 선명히 다가왔다. 나도 어떤 삶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의 사는 이야기 곳곳에서 동물과 인간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어떤 선택과 결정이 이뤄지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데, 특히 환경이나 동물권 등과 관련해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을 어떻게 자신의 생활과 일치시키는가 하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방향이 정해져야 생활의 방식도 강구할 수 있게 된다. “구멍 난 양말을 기우고, 물려받은 옷을 고쳐 입으며 주어진 물자 안에서 멋지게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하는 곳이라고 자신의 보금자리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다가 내 눈길이 멈춘 곳은 “멋지게 살아보려고”이다. 멋지게라…. 제 삶의 품격과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일은 멋진 일이다. 자신들만의 멋도 잃지 않는 삶의 방식이 경쾌해서 더 멋졌다. 지향하는 가치가 있다면 고민과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그러면 자신만의 취향과 방식을 하나하나 쌓을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 “단순한 취미 이상의 썸띵”을 잃지 않고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인생은 단단하게 꾸려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