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필립 로스, 《에브리맨》
천주교 재단의 중학교를 나왔다. 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녀원이 있고 바로 길 건너에 성모당이 있었다. 매년 5월 성모성월이면 전교생이 성모당으로 가서 단체 미사를 올리던 기억이 난다.
성모당 한쪽에 자리한 성직자 묘역은 특별한 곳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데, 한 번씩 할 일 없이 그곳에 가 앉아있곤 했던 추억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종교 수업도 듣고, 학과목 선생님 중에 수녀님도 계시고, 성호를 긋는 것이 일상의 풍경이라 종교를 가질 법도 했지만 희한하게 교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천연덕스럽게 성직자 묘역에 가 앉아있곤 했던 건 그 분위기에 끌려서였다. 고요, 침묵, 평온, 안식. 그곳에서 멍하니 있다 보면 마음이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아 낮아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때의 내게는 죽음이 고여있는 그 장소가 두려움이나 무서움보다는 안온함으로 다가왔고 그래서인지 각각의 무덤 주인들 또한 한 삶을 다 치르고 안식을 얻은 것으로 여겨져 내게 그 공간은 여러 의미로 ‘쉼’의 공간이었다.
열네다섯 살 무렵에 내가 가졌던 죽음에 대한 느낌은 그렇게 단순하고 추상적이기만 해서 안식(安息)이라는 말과 함께 정의되어 그저 편히 쉬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학교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을 시작으로 또 몇 년 뒤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보다 어린 후배가 세상을 등지는가 하면, 선배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러다 마침내 내 엄마가 돌아가시고… 하는 식의 부고를 접하고 들으며 지금껏 나이 먹고 있다.
철이 들어 접한 죽음은 모두 한 생애의 사연이 저절로 따라붙어 그때그때 내 나이만큼의 경험으로 그 사연을 짐작해 오해하거나 이해하며 감정이입하게 했다. 그러니 이제 내게 죽음은, 애통하고 침통한 것이며 지나치게 갑작스럽거나 지나치게 느려 무자비한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75쪽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 상점 이름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을 의미하는 ‘에브리맨’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니언 카운티 전역의 보통 사람”들에게 다이아몬드, 보석, 시계를 팔았다. 불멸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와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를 필멸인 사람들이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외상을 줘가며 말이다.
불멸과 시간은 모두 인간이 영원히 갖지 못할 것들이다. <에브리맨>은 보석 상점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죽음’이 한 주제로 흐르는 이 책을 읽다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인 존재로서의 우리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일단 삶을 맛”보고 있는 우리에게 죽음은 늘 뒷전이다. 매일매일을 사는 우리에게 죽음은 늘 남의 일이었고 내 경험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죽음은 항상 저 너머 어딘가에서 어렴풋하고 그래서 자주 뒷전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또 안다. 어느 날 반드시 내게 닥칠 필연의 일이라는 것을.
그러니 누군가의 일상이 싹뚝, 단절되는 광경과 마주하는 일은 유독 남의 일 같지 않아 극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깨진 것 같아 부당해 보이고 저런 부당한 일이 내게도 한 번의 기회 없이 집행될 테니 두려워 겁먹는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생각과 짐작은 내 개인의 사정이고 어떤 유난과 항변에도 사실 삶과 죽음은 자연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벤트다. 그저 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일상이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13쪽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83쪽
이 말은 그의 딸인 낸시가 그의 장례식날 세상을 떠난 그를 향해 읊조린 말이기도 하고, 그가 평생 좌우명처럼 쓰며 불행 앞에 선 딸에게 들려주었던 말이기도 하다. 인생의 좌절이나 뜻하지 않게 닥친 육체의 한계 같은, 삶에서 일어나는 비정한 일들은 결국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그러니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대개 숙연해지는 것은 그 존재가 살아냈던 전 생애의 생존 기록이 찰나 우리도 의식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전해져서가 아닐까. 꿈, 희망, 좌절, 욕망, 돈, 명예, 모욕, 수치, 시련…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이 산다는 건 그 사람이 무언가를 버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엄숙함이란 무언가를 버텼던 한 존재가 모두 내려놓고 갈무리된 자리에서 가지는 정중함일 것이다.
**뒤편의 이야기는 8월 9일(토) 업로드됩니다.
**인용글 출처: 필립 로스, <에브리맨>(문학동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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