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일 정도로, 절대 변하지 않을 세상이 그토록 간절할 때가 있다. 로자 아줌마가 온갖 욕과 야단을 퍼부어도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사실은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모모는 안다. 말하자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확실한 존재’이다. 그러니 그런 존재가 점점 늙고 병들어 몸의 온갖 기관이 고장을 일으키며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지기만 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면, 그래서 급기야 세상을 떠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절대 변하지 않을 세상이 그처럼 간절할 수밖에 없다.
병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내 것이든, 대신해 줄 수 없는 사랑하는 이의 것이든, 우리가 이어져 있는 이상 어떤 의미로든 모두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고통 받지 않고 늙지도 불행에 빠지지도” 않는 기계 세상이란 얼마나 황홀하게 반짝이는 신기루 같을까. 가지고 싶어 애가 닳도록 선망하는 것 앞에서 때로 인간은, 운다.
나는 녀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에게 줘버리기까지 했다. 그때 내 나이 벌써 아홉 살쯤이었는데, 그 나이면 행복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색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법이다. -29쪽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은 가질 수 없는 것 앞에서 애 닳아 울 때도 있지만, 울면서도 끝내 놓아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배우고 터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놓아줄 수도 있다는 걸 이미 아홉 살‘쯤’에 사색하고 터득했던 모모처럼.
모모는 훔쳐 기르던 개에 ‘쉬페르(최고)’라는 이름을 붙여줄 만큼 끔찍이도 아꼈지만 너무 사랑했기에 스스로 돈이 많은 부인에게 보내준다. 돈 한 푼 없는 늙고 병든 로자 아줌마의 집은 푸들에겐 가혹한 환경이라는 걸 알기에 녀석을 떠나보내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송아지처럼 울어도 마음만은 행복하다는 아홉 살 순정(純情)이라니.
어쩌면 우리는 얼마나 최선을 다해 놓아야 하는가를 배우면서 성숙하는 것이 아닐까. ‘최선을 다해’라는 말은 낼 수 있는 모든 안간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모모는 아줌마의 안식을 위해 그녀가 ‘유대인 둥지’라 불렀던 지하실에서 그녀가 원한대로 “조용히”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모든 안간힘을 다한다. 그녀가 떠나면 세상에 혼자 남겨질 거라는 불안에 떨면서도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녀 곁에 펴놓은 매트에 내 우산 아르튀르와 함께 누웠다.” -305쪽
병원으로 옮겨져 오래오래 “식물처럼” 사는 것도, ‘유대인 둥지’라 부르던 자신만의 둥지에서 “조용히” 죽는 것도, 모두 누군가는 옆에서 사력을 다해야 하는 일이다. 하긴 숨을 쉬지 않아도 사랑할 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면, 놓아주는 일에도 그렇게 사력을 다하는 것이 사람이다. 로자 아줌마가 숨을 거두고 몸뚱이가 성한 곳 하나 없이 썩어가는 동안 아줌마의 시신 옆을 지킨 모모의 몸 위로 밤마다 내려앉았을 어둠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사력을 다한다는 것의 무게를 생각한다. 그런 무거운 생의 불안은 대체 무엇으로 견딜까.
모모는 아마 ‘사랑’으로 견딘 것 같다. 죽어 썩어가던 로자 아줌마의 곁에서 발견된 모모는 구급차에 실려 갔다가 이후에는 “나에게 어떤 의무도 없는” 금발의 여인, 나딘 가족의 시골 별장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사랑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마음도 눈도 떨어지지 않아 차마 책장을 덮지 못하고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하릴없이 뒤적였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곳곳에서 선명한 연대와 사랑이다.
“로자 아줌마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파트 사람들은 무엇이든 도와주려 나섰다. (중략)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로자 아줌마가 바깥에 나가고 싶어할 때는 자기들이 안아서 내려주고 올려줄 테니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172쪽
영원할 것도 분명한 것도 없어 불안에 떠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약하다. 그렇게 약한 우리가 생의 불안에 지거나 적어도 잠식되지 않을 방법은 아마도 연대와 사랑인가 보다. 가난하지만 선한 이웃들이 지극히 당연한 듯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민하고 애정했듯 말이다.
나도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며 내 부모와 이웃과 친구들을 연민하고 애정할 나만의 방식이 있기를 바란다. 혹시라도 긴 터널을 지나야 할 그런 날이 온다면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모모를, 안간힘을 다하면서도 황폐해지지 않았던 모모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또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가, 얼마나 서로를 연민하는가, 하는 그런 마음을 잊지 말자고. 거대하고 불확실하기만 한 세상을 앞에 두고 우왕좌왕, 불안한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은 연대와 확고한 사랑이며, 생의 불안 앞에서 날뛰는 심장을 결국엔 다독이는 것도 연대가 품은 연민과 애정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사랑해야 한다.”
**인용글 출처: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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