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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Jan 23. 2021

1-5) 그립다 쓰고 전하지 못하는

 집에 레드향 한 박스가 배달되었다. 엄마가 보냈는지 엄마한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멀리 사는 딸내미 과일 챙겨 먹이려나 싶었는데 쿨한 엄마는 자기가 아니란다. 다음으로 생각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다른 친구네 농장에서 사서 보냈다며 맛있게 먹으라 했다. 보낸 이 모를 선물을 받았을 때 당장 떠올릴 수 있다는 사람이 있어서 기쁘고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라서 행복했다.  


 서울에서 혼자 살게 된 지 12년쯤 되었을까. 새삼 참 오래도 외로웠구나 싶다. 어떤 이는 외롭다 생각하면 외로워지는 것이다, 거리와 상관없이 친구와 가족들이 있는데 왜 외롭냐 다그치기도 했었다. 친구와 가족들이 손 닿을 거리에, 매일 볼 수 있는 집 거실에 있는 사람이 툭 뱉은 그 말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곤 했었다. 그저 나를 나약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면 마치 내 외로움이 가벼워지기라도 하듯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가장 그리운 것은 단연 친구일 것이다.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훌렁 까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친구들이 가장 그립다. 


 나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들은 여러 곳 떠돌아 다시 제주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우여곡절 많았지만 우리는 20년 가까이 우정을 지켜오고 있다. 그중 단연 손에 꼽히는 나를 포함하여 5명의 친구들은 직장, 학교, 전공, 사는 곳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몇 달 혹은 몇 년 만에 만나도 “왔어?” 한다. 마치 어제 본 사이처럼. 긴 우정의 비결이랄까. 그 대수롭지 않은 인사가 그렇게 정겹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도 여느 친구들처럼 카페에 가서 수다 떨기를 즐기고, 맛집 탐방을 가 사진 찍기 바쁘고, 정말 가끔은 펜션을 빌리거나 멀리 사는 친구 집에 모여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친구 차에 있던 캠핑 의자와 협재 해수욕장


 그런 우리가 간만에 모이게 된 어느 날, 정겹게 웃고 떠들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가만히 듣고 따라 웃고만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주로 듣는 포지션이 되어 있었고 가끔 멍하게 친구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쳐다보고 있곤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광주에 살다 제주도로 다시 돌아온 친구에게 또 다른 친구가 물었다. 


-       너 이번 주에 가기로 했어?

-       아 모르겠어. 정말 나도 가기 싫은데, A언니 온다고 B언니도 가기 싫다고 난리야. 내가 저번에 말했지? A언니가 우리 애기한테도 자꾸 혼내고 윽박지르고 한다고. 

-       어. 나도 그런 거 정말 싫어. 정말 버릇없는 거 아니면 남의 애한테 그러기 쉽지 않은데. 

-       근데 어쩌겠어. A언니 성격이 그런데 자기 애한테도 그러는 걸. 


 미혼이기 때문에 그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 속의 언니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만나본적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왜냐면 친구들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언급한 이름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성격인지 어떤 사이인지 가족관계며 직장 등 모르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난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대화에 끼지 않았고 가끔 맞장구나 칠 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친구들의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지인들과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혼자 동떨어진 길을 걸었다.


 이러한 소통은 내 입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울에서 혼자살이 하면서 함께 해온 서울 지인들, 사회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 꺼내놓기란 무척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름, 나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하나하나 열거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 이야기들은 친구들과 나 사이에 묘한 공백을 만들었다. 지인들에 대한 얘기만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에 대해 친구들에게 이야기 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약간의 핑계를 대자면, 내 나름대로의 배려도 섞여 있었다. 친구들의 입장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느껴보지 못한 경험에서부터 비롯될 지루함이 걱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 사이 오가는 대화를 가만 듣고 있자니 내심 부러운 마음이 치솟았다. 내 친구들은 서로의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서로가 없던 시간과 장소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태여 설명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 몸이 가까울 때에만 적용이 되는 건가 싶다. 상대방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내리 판단하고, 말하기를 포기하면서 난 친구들한테서 조금씩 멀어져 왔다. 이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새삼 재잘거리는 친구의 입이 참 부러웠다. 친구는 의외로 내가 포함되어 있는 그 시간에 함께 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내 삶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 속에 나를 위로해주고 싶은 순간을 내 마음대로 차단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태여 친구들에게 지루해질 권리까지 보장했어야 했다. 지루한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나면 우리는 한층 더 가까이에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위로가 또다시 혼자 견뎌내야 할 많은 날들 속의 나를 두고두고 안아주었을 것이다. 


 이번에 제주에 내려가면 수다쟁이가 되어보겠다 다짐한다. 그리고 시시콜콜 하나같이 지루한 일상의 이야기들로 그립다 말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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