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생태계에서 빠져나온 지 1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몸은 그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 달 주기로 생활하는 매거진 종사자는 마감 전과 마감 후 모드로 몸이 버틴다. 매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10일부터 20일 사이가 가장 바쁘게 돌아간다. 진행이 더디면 10일 전부터 고생하기도 하고, 진행이 빠르면 20일 후에도 마감 모드는 꺼지지 않는다.
나는 회사원일 때나 아닐 때나 매거진 마감이 걸려 있으면 몸이 애가 탄다. 막내 때부터 데드라인을 지키는 혹독한 훈련을 받아와서 그런 지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는 편이다. 매거진 기사를 만드는 것은 에디터 혼자의 일이 아니다. 에디터, 사진가, 디자이너가 주축이 되어 공동 작업이 이루어지다 보니, 원고를 끝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후에 진행되는 일정까지 고려해서 원고를 마무리지어야 한다. 글쓰기를 종종 건축에 비교하는데, 기사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매달 집 하나를 완성한다고 치자면, 달마다 나에게 배당된 몫은 가장 큰 안방일 때도 있고, 작은 화장실을 여러 개 만들어야 할 때도 있고, 베란다를 화룡정점으로 내세워야 할 때도 있다. 큰 방이든 작은 방이든 허투루 할 수는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기사를 만드는 모든 이의 고민이지만, 가장 먼저 땅을 고르고 골조를 세워야 하는 에디터의 글은 그들이하는 고민의 실마리가 되어줘야 한다. 여백을 빼곡히 채울 글을 따라 사진을 얹고, 폰트를 바꾸고, 페이지가 나뉜다. 나는 매달 마주하는 허허벌판 같은 백지가 두려우면서도 늘 설렜다.
여행기는 여타 매거진 기사를 쓰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여행 기사는 사전 기획대로 되는 법이 거의 없다. 떠나기 전 아무리 탄탄한 야심을 품더라도, 다녀와서 쓴 여행기는 전혀 다를 때도 있다.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은 여행기도 손가락에 영혼을 실어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문장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게 된다. 여행 매거진에서 처음 글을 쓸 때 스스로 경계했던 것은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사심이 들어간 여행이 왜 없겠는가? 개인적으로 여행은 객관화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여행 기자로서는 최대한 객관화된 시선으로 덤덤하게 써 내려가고 싶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내가 좋다고 남도 좋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잘 쓰고 싶어, 아니 내가 그렇듯 여행기를 읽는 기쁨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 잘 쓰고 싶었다. 글로벌 매거진의 여행 기사를 많이 읽었다. 번역본을 편집하다 보면 여행가의 원문과 번역이 잘 맞아떨어지는 지 꼼꼼히 체크해야 하는데, 나는 그 과정이 참 좋았다. 문장 하나하나의 오역을 찾아내다가도 뒷 이야기가 궁금해 안달이 난 적도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 작가의 글을 읽을 때면 균형이 좋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결국은 그게 참 객관적으로 와 닿는다.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그들의 좌충우돌의 이야기에 껄껄 웃기도 한다. 언제쯤 그런 여행기를 써볼 수 있을까? 문득 새벽 마감을 하다가 전 세계 여행 애호가들의 글을 읽는 것에 벅차 올라 이런 걸 남기기도 했다.
직업 여행자였던 나는 기사를 마감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여행이 끝낼 수 있었다. 캐나다 위니펙 기사는 취재를 다녀온 지 6개월이 지나서 책에 기재가 됐는데, 10월 중순에 본 북극곰을 다음 해 봄까지 기억에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캐나다 원고를 호주 출장 중에 썼는데, 그때 나는 이곳이 호주인지 캐나다인지 헷갈릴 정도로 여행기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렇게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씩 안고 있어야 하는 여행이 있었다. 여행기는 꿈처럼 앞뒤 없이 뒤섞인 시간과 감정을 정리한다. 한 가지 주제로 여행을 모으기도 하고, 여행 후 잔상을 쭉 나열할 때도 있다. 자의든 타의든 써 내려가다 보면 여행하는 내가 다시 보인다. 가만히 쓰고 싶은 상황을 떠올리면 스쳐 지나간 간판과 거리의 표지판, 귀를 스치던 음악, 낯선 냄새 등 기억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사진이나 음악은 여행 기억을 소환하는 좋은 보조 장치다. 요즘 시대는 영상으로 여행기를 대신하기도 하는데, 나는 여전히 아날로그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써야만 그 여행을 털어낼 수 있을 것같다. 최근엔 아직 털지 못한 여행이 많아서 마감을 못 끝낸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무겁다. 슬슬 몸이 애가 탄다.
“글을 쓴다는 것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지방국도를 달리는 것이다. 막다른 길로 잘못 진입했다가 빠져나오고, 우회도로를 선택하기도 하고,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도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길을 달리는 동안 예상외의 글이 탄생하기도 한다.”
소설가 김중혁 님의 <바디 무빙>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문구를 발견하고, 작년에 털지 못한 여행기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 다짐을 되새기기 위해 이런 쓸모없는 글을 또 써보았고요. 하하. 네, 이럴 시간에 여행기나 쓰면 될 걸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