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맞고 일상은 틀리다
일전에 블로그에도 쓴 적이 있는데, 나는 베짱이의 삶을 지향하지만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개미형 인간이다. 20대 때 숱한 밤을 함께하며 일한 선배들은 여전히 나를 한량 기질이 타고난 애로 기억하지만, 사실 나는 매일이 불안했다. 쉬는 날엔 무조건 나가 놀아야 하고, 일할 땐 치열하게 달려들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무엇을 위해 시간을 쏟는지 모르고 그 시간을 악착같이 채우고 결과를 만드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 물론 인생의 어떤 시기는 분명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애 가장 어렸던 어른의 시간을 추억하면 뻔뻔하게도 일말의 후회가 없다. 나는 잘 놀았고, 열심히 일했다. 만약 개개인의 삶도 자동차처럼 배기량 같은 게 정해져 있다면, 난 그 총량을 탈탈 털고 비상연료까지 써서 달렸으니 그 이상을 해내라는 말은 이미 멈춘 차에게 달리라고 소리만 쳐대는 꼴이었을 것이다.
최근 지인이 소개해준 라이프 컬러링 원데이 수업을 찾아가 봤다. 나의 일상을 돌아보며 하루 중 어떤 시간에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감각을 느끼는지, 온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불안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고 미뤄두기만 하는 일들은 과연 게으름 때문인지, 과연 어떤 감정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는지. 선생님은 우리가 왜 일상을 들여다봐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조곤조곤해줬다. 일종의 단체 심리 상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상을 컬러로 나누면서 그 속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감정을 쏟아냈다.
나의 경우는 퇴사 후 남아도는 시간을 제대로 채우고 있지 않다는 강박이 컸다. 최근 일주일의 일상을 들여다보니 넷플릭스로 하루를 시작해 하루를 마감하는 일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저런 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생님은 혹시 그건 자신 또한 경험한 바 있는 무언가로부터의 도피일지 모른다고 했다. 마땅히 할 일을 미루기 위한 핑계로 넷플릭스를 딱 한 편만 더 보기를 반복하고, 친구와 약속을 잡고, 부러 새로운 공간을 탐닉하고, 도망의 하이라이트인 여행을 떠난 건 아닌 지. 어떤 마땅한 일이 몸과 마음을 묵직하게 붙잡고 있는 것인가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휴식을 위한 시간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어김없이 따뜻한 여행지에서 볕이 좋은 카페를 찾아 들어가 책을 읽고 싶다고 썼다.
여행은 새로운 일상을 만든다. 아침에 일어나 정갈하게 펼쳐 놓은 조식을 먹고 점찍어둔 곳을 찾아가 관광을 하고 마땅한 점심 장소를 찾고, 카페에서 뭉개져 있다가 또 관광을 하고, 분위기 좋은 저녁 식사를 기대한다. 평범하지만 일상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회사를 다닐 때나 안 다닐 때나 보통 아침은 챙겨 먹지 않고, 매일 가고 싶은 카페와 식당을 생각할 만큼 그 시간이 설레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나의 또 다른 자아는 어찌나 관대한 지, 웬만하면 근거리는 걸어서 이동하고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도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과감히 숙소에 하루 종일 머물며 책을 보거나 놓친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 놓기도 하고, 미술관에 하루 종일 머물며 미로를 헤매듯 움직인다. 유명한 건축이나 관광지를 둘러봐야 하는 강박도 없고, 여전히 내가 고수해온 여행의 철칙 중 하나인 하루에 하고 싶은 건 딱 한 가지만 한다.
여행하는 내 분신은 오직 나에게만 집중한다. 걷다가 힘들면 쉬고 쉬는 게 지루하면 걷는다. 먹고 싶으면 먹고 내키지 않으면 굳이 찾아 먹지 않는다. 여행에서는 시간이 곧 돈이라 말한다면 나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어쩐지 여행에서의 게으름은 부끄럽지가 않다. 2년 전 파리 출장 중 운 좋게 하루 일정이 비었던 날엔 호텔에 들어앉아 프레 타 망제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으며 송강호가 나오는 한국 영화를 봤고, 몬트리올에서는 아주 컨디션이 좋은 에어비앤비를 빌렸는데, 전날까지 이어진 콘퍼런스의 피로가 꽉 차 이틀 정도는 잠만 잤다. 포틀랜드에서 하루는 비가 오는 바람에 멕시코 식당에 눌러앉아 반나절 동안 술만 마시기도 했다. 모두 아주 흡족한 추억들이다. 어쩌면 나는 게으른 일상을 만끽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걸지도 모른다.
“이곳에 찾아올 때 어떠셨어요? 낯선 동네를 걷는 데 약간 긴장하셨죠? 골목이 많아서 길을 잃기 딱 좋은 동네예요 여기가. 모르는 동네라 배가 고프면 모르는 식당에 들어가 신중히 메뉴를 골라야 하죠. 그러다 카페가 보이면 커피 한잔하고 뭐 그렇게 또 걷고.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사실 이런 게 여행이잖아요.”
수업 중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이라는 말은 참 실천이 어려운 이야기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가 늘 엉망인 걸 보니 결국 둘 다 별로였는지 지 모른다. 이미 어질러진 방을 치우는 것보다는 방에서 쓰윽 빠져나와 깨끗한 방으로 도망을 가는 게 언제나 더 쉬웠다. 비록 내가 되돌아가야 할 방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어질러 놓은 그곳이거늘. 그러니까 방학 숙제를 잔뜩 껴안은 채 묵직한 마음으로 방학을 보낼 것인가, 차근차근 하나씩 해치우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는 오직 나에게 달린 것이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모여 앉아 일상을 나누는 3시간 동안 낯선 이들은 서로를 위로했지만, 사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몇 마디를 내뱉고 몇 글자 쓰다 보니 내 문제에 대한 답을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스스로 그 묵직한 이유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 목구멍 위로 내뱉을 수 없었을 뿐. 그래도 지난 목요일 오전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귀한 시간에 두서없이 써 내려간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께 올해는 부디 모두가 자신의 일상을 여행하는 사람이 되길.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 이런 글도 써보았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