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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Jan 30. 2020

새해가 달갑지 않다

일상 여행자의 마음 훈련

새해다. ‘올해는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 ‘건강 하자’ ‘금연 하자’ ‘공부하자’ ‘새로운 일을 하자’ 등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덕담을 나도 주워 먹는다. 모든 것은 12월 31일이 되면 까맣게 잊어버릴 다짐들이다. 12월과 1월 사이,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올핸 더 열심히를 외치는 아이러니를 매해 반복하는데, 아무리 즐기려 해 봐도 나는 연말과 연초가 영 달갑지 않다. 아직 나에겐 올해가 끝나지 않았는데 자꾸 여기서 이만 끝내라고 종용하는 분위기가 때때로 불편하다.


 12월은 언제나 갑작스레 다가오고 허무하게 지나간다. 업무를 잔뜩 남긴 채 퇴근을 하는 모양새로 한 해를 보내고 나면, 마치 세상에 속은 듯한 기분도 든다. 해가 바뀌면 주변이 리셋되고 새 게임이 시작될 것처럼 부추기지만 시간은 늘 우리를 제자리에 남겨두고 도망가버린다. 12월 32일, 33일 혹은 13월로 새해를 시작하는 사람도 내 주변엔 참 많은데 말이다.

 

 영화 <와일드>에서는 4천 킬로미터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걷는 주인공 짐을 덜어주기 위해 나선 전문가가 이드북의 다 읽은 부분을 찢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지나온 길의 지도는 필요 없다는 거다. 여전히 가이드북을 보험처럼 생각하는 여행자는 공감하겠지만, 책은 여행에 매우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짐이 될 때도 많다. 여담이지만,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인도> 편은 벽돌보다 두툼한 두께로 위기 시 무기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안전한(?) 책인데, 실제 이 가이드북을 가지고 인도 여행에 나선 전 세계 여행자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여행한 챕터를 하나씩 찢어버리며 다녔다고 한다(류준열이 쿠바를 여행할 때 종종 등장했던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얄팍해진다).


 영화로 돌아가면, 이미 지나온 길의 무게를 더는 건 주인공의 자의가 아닌 타인의 의지다. 이 장면은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동시에 주인공이 지고 있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더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해설을 읽고 나니 더욱 짠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단절시키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좋든 싫든 과거의 시간은 현재를 표류한다. 연말과 연초를 떠들썩하게 보내며 2019년의 시간을 과감히 찢어버리고 2020년에 들어선 사람들을 보며 나는 그 어려운 일을 참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린아이에게 아침이 좋으냐 밤이 좋으냐고 묻는 장면을 보았다. 지극히 단순한 그 질문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은 예상외로 대부분 아이들이 아침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24시간을 출퇴근이라는 이분법적 시간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어른은 밤을 기다린다. 밤이 특별히 좋다기보다는 퇴근 후 자유로운 몸은 대체로 밤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아침의 시간은 늘 의무감이라는 무게로 짓눌려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지만, 순환되는 시간 속에서 때때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시계와 달력에 갇혀 살다 보면 누군가는 시간이 넘쳐흘러서, 때론 24시간이 모자라서 매일이 고단하고 골치가 아프며 아침은 너무 빨리 온다.


 내 인생에 가장 떠들썩한 연말을 보낸 건, 스물아홉 살의 해였다. 12월 31일 런던아이 앞에서 서른을 맞이했다. 폭죽이 터지고 반짝이는 조명 아래 낯선 이들과 허그를 하고 볼뽀뽀를 하며 외국인 사이 틈에 끼여 있었다. 주위의 흥분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새해를 맞는 것이 그토록 벅찬 적이 없었고, 서른을 맞이한 나에겐 또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지 설레기까지 했다. 흡사 아침을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었던 거다. 돌이켜보면 당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던 것은 그해를 가장 충만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1년 간 이방인으로 사는 동안 나는 매일 선물 같은 아침을 맞이했고,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나날을 보냈다. 당연히 내년에도 그런 나날들이 이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여행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김영하님이 여행책에서 말한 이 문장을 마주하고 당시 내가 경험했던 그 기이한(?) 새해 감정을 뒤늦게 이해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나는 1년을 온전히 현재로만 살았다.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못 올 오늘을 매 순간 절감하며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보낼 것인지만 골몰했다. 전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북유럽 사람들의 일상 고민이 ‘오늘은 꽃병에 어떤 꽃을 꽂을까?' 라면, 당시 나에겐 ‘내일은 무얼 하고 놀까?’ ‘다음 달에는 어느 도시로 떠나볼까?’가 최대 고민이었으니까.


 매해 새해가 되면 여행자의 마음을 끄집어낸다. 숫자 따위에 안주하는 대신, 앞으로 사는 동안 나를 둘러싸고 펼쳐질 사건 사고에 조금 더 너그럽게 대처하길 소원한다. 일상을 여행하라는 말은 곧 현재를 온전히 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나간 어제를 과감히 지우고 내일 아침을 고대하며 사는 오늘. 앞으로의 생에 나는 그런 날을 조금씩 늘리기로 결심한다. 장기 목표가 되겠지만 더 나은 여행자가 되기 위해선, 여행자의 마음을 훈련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여행을 잘하는 사람보다 일상을 잘 여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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