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젊은 날엔 시간과 체력으로 돈을 충당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돈으로 시간과 체력을 산다. 이는 비행기 좌석을 택할 때 극명하게 나타난다. 보통 비행기표는 경유 시간이 길수록 가격이 싸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직항을 타야 하고, 장거리 비행 시 체력을 비축하려면 허리를 곧게 펼 수 있는 비즈니스 좌석이 여러모로 낫다. 시간과 체력이 곧 돈이고, 돈으로 시간과 체력을 절감하는 셈이다. 이처럼 물질 만능으로 통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종종 자본주의의 단면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일반적으로 재정 상태가 좋으면 당연히 여행의 질과 만족도가 함께 상승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돈을 퍼붓는다고 모든 여행이 완벽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여행의 폭을 넓히기 위해선 돈과 체력, 시간의 삼박자가 고루 맞아야 한다. 예를 들어 히말라야에 오르거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땐 돈보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어떤 물리적 한계를 스스로 극복할 때 여행의 효용이 극에 달할 것이다. 숙박비가 모자라 남의 집 거실에 놓인 카우치를 빌려 잠을 자고, 경비를 아끼기 위해 몇 개국의 도시를 돌아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 한다한들 그 여행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불편과 불행이 반드시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다. 여행이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최고의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여행하는 ‘나’라는 주체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어떤 여행을 계획할 때는 저마다의 가면을 쓴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리는 이방인인 동시에 무엇도 될 수 있다. 나를 규정하는 건 오직 나뿐이니까. 평소 수줍음 많던 사람이 외국어가 터지면 세상 다른 사람처럼 친화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일상에선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에도 쉽게 움츠러드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낯선 여행지에 던져진 '나'는 자의든 타의든 가면 속에 감춰진 자신의 민낯을 가감없이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마주한 나는 뜻밖에도 '잘 못 노는 사람'이었다. 평소 나와 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몇몇은 비아냥거리며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몇몇은 ‘맞아, 걔 사실 좀 그랬어’ 라며 수긍할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일지 모르나 주변에 워낙 흥이 좋은 외국 친구들이 많아서 나는 늘 ‘Don’t be shy’라는 타박을 들어야 했다. 음악 소리가 저 멀리서 옅게만 들려와도 어깨와 허리, 엉덩이를 리드미컬하게 흔드는 외국 친구들 틈에서 종종 나는 어색한 박수만 치고 있는 쭈구리 역할이었다. 당시 한국에 대해 물으면 게임 잘하는 나라, 김정은 그리고 나 밖에 모른다고 말하는 라틴계 친구들 앞에서 한국이 얼마나 흥이 많은 민족인지를 몸소 보여줬으면 지금쯤 BTS와 봉준호 감독을 보며 그때 만난 동양인 여자애를 한 번 더 인상적으로 기억해 주려나?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때때로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면 그 캐릭터에 맞춰 행동하려 한다. 캐릭터에 충실하다 보면 스스로의 행동이 거북스러울 때가 있고, 뜻밖의 대견스러운 행동으로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한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도 속고 넘어가고 만 솔직하고 가장 나다운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여행하는 ‘나’라는 주체는 변함이 없지만, 여행의 방식은 많이 달라졌고, 그때마다 쓰는 가면도 점점 다채로워진다. 어떤 여행에서는 개인 리무진의 픽업 서비스를 받는 비즈니스 여행객이었다가 시간과 체력으로 경비를 절감하는 카우치 여행자 되기도 하다. 여전히 재미없고 뻔하디 뻔한 뒷방 캐릭터로 파티를 재끼고 호텔로 기어 들어가 혼자 청승을 떨기도 하지만 때때로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클럽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녘 기름진 도넛을 사 먹으며 한적한 관광지에 드러누워 일출을 보기도 한다. 사실 그날 어떤 가면을 썼든 그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든 아니든 지나고 보면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만약 여전히 여행지에서 움츠러들거나 낯선 도전이 두려운 사람이라면 ‘난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라며 자책하지 말고, 그저 오늘 맡은 캐릭터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하며 그 감정을 밀고 나가길.
일말의 목적을 가지거나 계획했던 여행이 대부분 실패하는 것은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일은 드물더라도 예상치 못한 사소한 변수를 수시로 맞닥뜨리고,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다스리다 보면 여행은 어느새 끝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여행의 득실에 관한 중간 정산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딱히 없다. 망설임과 자책은 여행의 순수한 즐거움을 반감시킬 뿐이다. 그러니, 자랑하고 싶은 여정을 애써 만들려고 하지 말고, 지금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어떤 가면을 썼든 순수한 자신의 감정을 즐기thㅔ요(일전에 함께 여행 취재를 떠난 노홍철 님의 육성이 떠올라서 그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