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로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건 간단하다. 대화의 모든 주제를 자신의 여행 경험과 엮어 자랑하듯 말하면 된다. ‘아, 비어가르텐에서 먹던 맥주가 생각나는 밤이다. 아, 비어가르텐이라고 들어 봤나? 독일 사람들은 야외 정원에 테이블을 쫙 깔고 맥주를 마시는데 그게 말이지…’ <여행 이야기로 주위 사람들을 짜증 나게 만드는 기술>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지인의 여행기를 반복해서 들어줬던 기억을 바탕으로 이같은 여행 진상들을 고발한다. 그걸 또 유쾌하게 기술집처럼 묶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여행 좀 다녀봤던 이들은 대부분 조용히 반성하게 된다. 여행에 만취한 진상이 바로 내 모습인지 자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랑을 일삼아야 하는 직업 여행자는 어땠겠는가? 목차만 봐도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거 같아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런 글을 쓰는 건, 여행을 못 가고 묶여있는 시국이 서글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부르는 사진은 외장하드에 가득하고, 그걸 또 정리하고 있자니 열불이 나고, 다시 우울하고. 그래서 이건 자기 위로와 같은 글이며, 최근 내가 여행할 때마다 주로 하는 짓에 대한 정리다. 여행의 패턴을 좀 바꿔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하길 바라며, 부디 짜증은 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출근 시간 카페에서 아침 먹기
시차를 잘 겪지 않는다. 어디서든 잘 먹지는 못하지만(제가 의외로 비위가 약해요) 잘 잔다. 바람이 잘 드는(?) 오두막에서도 잘 자고,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내리 10시간을 잔 적도 있다. 여행을 하면서 유일하게 시차를 제대로 겪은 건 뉴욕에 갔을 때인데, 미국에 머무는 3주 동안 매일 9시에 잠들어 6시에 깼다. 그때 알았지만, 아침형 인간이 되고 나면 아침밥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는 출근 시간이 좀 이른 편이라, 7시부터 영업을 하는 카페가 꽤 많다. 일단 나간다. 호텔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출근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현지인으로 북적이는 카페가 보이면 들어간다. 대부분 커피 맛집일 확률이 높다. 갓 구운 빵도 잔뜩 진열돼 있다. 현지인 틈에 끼어 바에 기대 서서 커피도 마셔보고, 여유롭게 책을 펼쳐 놓고 남의 하루를 구경하기도 한다. 생판 모르는 출근러 틈에 서 커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어쩐지 막 현지인이 된 것 같고 그럴 때, 우리는 여행의 진정한 효용을 체감하는 거 아니겠는가!
돈이 없을 땐 호텔 크롤링
출장이 잦다 보면 별의별 숙소를 다 경험하게 되는데, 어떤 때는 5일 일정에 5개의 숙소를 매일 같이 갈아타는 경우도 있다. 짐을 풀고 싸는 건 귀찮지만, 호텔은 다녀볼수록 경험치가 는다. 개인적으로 여행할 땐 호텔을 매일 같이 옮기는 호사를 부리지는 못하지만, 여러 개의 호텔이 탐날 땐 호텔에서 운영하는 바를 돌아다니는 걸로 대신한다. 레스토랑은 좀 다르지만, 바는 호텔이라고 해서 술값이 감당 못할 정도로 비싼 건 아니다. 칵테일 1잔만 주문해도 호텔 분위기와 서비스를 두루 경험해볼 수도 있다. 이건 파리나 런던에서 내가 주로 하던 짓인데, 워낙 독특한 부티크 호텔도 많고 빠르게 트렌드가 바뀌다 보니, 공부도 되고 여행의 경험치도 올라간다. 바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상상하면 어쩐지 어깨도 조금 펴지는 것 같고.
다시 만나요, 이층 투어 버스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한다. 나는 2층 버스가 여행 초보자나 노인들이나 타는 것이라고 속단했다. 저걸 돈 주고 탈 일은 절대 없을 줄 알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골든 게이트를 건널 생각이었다.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인 앤 아웃 햄버거도 잔뜩 먹어 뒀다. 자전거 렌털 샵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북적이고 흥정하려는 종업원에 지쳐 잠시 거리에 나와 앉아 있는데, 빨간색 2층 버스가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 멈춰 섰다. 적절한 먹잇감을 발견한 친절한 안내원이 티켓을 끊어오면 바로 태워준다고 했고, 홀린 듯 50불을 넘게 주고 버스에 올랐다. 골든 게이트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2층 버스는 안락했을뿐더러 가이드의 설명도 어찌나 유익한 지, 귀찮아서 꺼내기 싫었던 가방 속 가이드북을 친절히 읊어주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묵는 호텔이 경로에 포함되어 있어 드롭까지 가능한 게 아닌가? See you again. 호갱에게 보내는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다음 도시에서도 2층 버스가 보이면 네, 다시 만날 것 같아요.
행선지 모르는 배에 올라타기
자칫 위험 요소가 좀 있는 짓이다. 그러나 의외의 것을 건질 지 모른다. 나는 헬싱키 도심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무제한 교통 패스로 탈 수 있다는 배에 무작정 올랐다. 마침 백화점 앞에서 산 체리도 좀 편히 앉아서 맛보고 싶었다. 물론 배가 필요한 건 아니었고, 의자만 있으면 될 문제였지만 배가 그곳에 있으니 일단 오르고 본 것이다.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지만 헬싱키의 대표 관광지인 수오멘린나섬에 들어가는 페리였다. 얼떨결에 도착한 바다 한 가운데의 요새를 둘러보며 그네도 타고, 사진도 찍고, 반나절을 여유롭게 쉬다 온 게 전부지만, 헬싱키 여행을 떠올리면 어쩐지 그때의 추억이 가장 먼저 기억난다. 이와 같은 무모한 짓은 리스본에서도 해봤는데, 지금까지도 내가 배를 타고 갔던 곳이 어디인지 정확한 지명을 모른다. 그저, 내 생에 최고의 노을을 선사했던 곳이라고 기억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