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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Jul 30. 2020

사정은 딱하지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자기만의 인생 해답지가 있나요?

 런던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막 가까워지기 시작한 다국적 친구들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밀라노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나폴리 출신의 미켈리는 똑똑했고 자존심이 셌으며, 늘 다정다감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담배를 자주 피웠다. 무리가 함께 모여 있다가 그가 조용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담배를 말고 있거나 피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 번은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냐고 사심 없이 물어본 적이 있는데, 아홉 살 때 처음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워보고는 평생 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의 영어가 서툰 것인지 아니면 감정의 행간을 본 것인 지, 문장 사이에 호흡을 주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내 어릴 적 일화 중 지금도 부모님이 종종 이야기를 꺼내며 놀리는 것도 아홉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애가 엉엉 울며 집에 와서 대체 무슨 일인지 하고 물었더니 날씨가 너무 춥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아홉 살이나 먹은 아이가 겨울을 처음 겪은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날은 과연 눈물이 날 만큼 추웠던 것일까? 그때의 심정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쩐지 지금도 겨울의 한파가 들이닥치면 괜히 우울해진다. 미켈리는 어쩌다가 아홉 살에 평생 담배를 곁에 두고 살아갈 것을 예감했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홉 살 인생은 불현듯 닥쳐온 시련을 어떻게 겪어내는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울어 버렸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스스로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 지도.


   런던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집주인에게 사기를 당해 쫓겨나고, 두 번의 소매치기를 당하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던 콜롬비아 출신의 의사 카탈리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한결 같이 밝았다. 친하게 지낸 몇몇 친구들이 모여 그녀의 속사정을 전부 듣고 얼굴이 사색이 됐을 때도 정작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가 런던에 도착한 순간부터 불행이 작정하고 곁에 붙어버린 것인지 그 후에도 비자에 문제가 생겨 매일 같이 관공서를 뛰어다녔고, 새로 구한 집의 룸메이트가 말썽을 피우고, 고국에서 안 좋은 소식이 연달아 날아왔다. 그녀와 런던에서 함께 지낸 시간은 고작 7주 정도였는데, 그녀를 둘러싼 다채로운 사건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자주 수업 시간의 토론 주제가 됐다. 매번 각국의 문화를 기초해 열띤 토론이 진행됐지만, 그녀에게 해결책이 될 만한 묘안은 거의 없었다.  


‘사정은 딱 하지만, 우리(영국)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아무것도 없어. 안타깝다. 정말로.’


 내가 아는 현명한 영국인은 저 말이 불만을 토로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이방인의 입을 닫아버리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잘 아는 것 같다. 우리 반 선생님도 늘 그랬다. 학생들의 영어 토론 실력은 늘었을지 몰라도 결론은 언제나 런던 시내 공무원이 흔히 달고 사는 저 말로 희망 없이 마무리됐다. 여전히 내 눈에는 그녀의 사정이 매일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일 것처럼 보였지만, 주변의 걱정이 무색하게 카탈리나는 매일 흥겨운 음악에 춤을 췄고, 학교는 종종 빠졌지만 친구들과 자주 모이는 펍이나 기숙사에 가면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자리를 채웠다. 콜롬비아로 돌아가는 날까지도 그녀는 런던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며 눈물을 글썽였고, 이내 또다시 웃으며 내 앞에서 춤을 췄다.


 여행에서 만난 인연은 대체로 정확한 나이와 출신, 서로의 풀네임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헐거운 관계로 맺어진다. 찰나든 영원이든 서로의 삶에서 일정 기간 접점을 이루며 서로를 기억에 둔다. 누구에게나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국적, 성별, 나이, 직업, 외모를 총망라해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 챕터는 분명 여행하는 순간일 것이다.


내가 언제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는 짧은 인연과의 일화를 수시로 떠올리는 것은 자서전을 쓰기 위해서는 아니고, 글로벌 인맥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모두의 삶에는 각기 다른 답이 있다는 걸 일깨우기 때문이다. 나의 책에선 미켈리나 카탈리나의 챕터를 펼치면 인생의 시련과 불행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히 받아들이고, 웃고 춤을 추면 그만이라는 교훈이 들어 있다. 그렇게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멋진 풍경 앞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이 아니라 종종 제3의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일상을 잠시 환기시킨다. 언젠가는 온전한 나의 경험으로 지은 인생의 해답지를 만들고 싶은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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