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크게 달라지지 않습디다
나는 베짱이의 삶을 지향하지만 한시도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개미의 유전자다. 20대 중반 숱한 밤을 함께 지새우며 일한 선배들은 지금도 나를 한량 기질이 타고난 애로 기억하지만, 정작 나는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20대 중반 사회 초년생의 상자에 갇혀 '남들처럼 살고 있는 걸까'라는 끊임없는 의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만 같았고 늘 낭떠러지 끝에 간신히 발을 딛고 사는 기분이었다(실제로 당시 그런 꿈을 무척 많이 꿨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할 땐 치열하게 달려들었고, 쉬는 날조차 20대의 열정을 마땅히 쏟아야 한다는 미명 하에 유흥에 열심이었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쏟는지 모른 채 그저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무엇이라도 악착 같이 채워야만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안심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년 시절을 이야기할 때 종종 자기 연민에 빠진다는데, 나는 20대의 피, 땀, 눈물을 다 쏟아부은 첫 직장을 이야기할 때 그랬다. 애증 했던 회사를 그만두고서도 한참 동안 세상 고생을 혼자 다한 사람처럼 굴었던 것이다. 당시 퇴사자의 클리셰처럼 장기 여행을 결심한 건 지리멸렬하게 따라붙는 자기 연민의 감정을 떨치기 위해서였고,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버거웠던 현실로부터 나를 멀리멀리 데려갈 거라고 믿었다.
1년 간 일을 쉬면서 유럽 곳곳을 여행하는 동안 잠재된 자기 연민의 감정은 예고 없이 표출됐다. 처음은 런던 코벤트 가든의 오래된 극장에서 뮤지컬 <맘마미아>를 볼 때 돌연 찾아왔다. 이야기 속 모든 갈등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고 무대 위 배우들이 다 같이 아바의 댄싱퀸을 열창하는 피날레 무대였는데, 불현듯 나 홀로 갈등을 풀지 못하고 남겨진 조연처럼 서글퍼졌다. 무대는 물론 모든 관객이 흥에 겨운 상황 속에서 애써 눈물을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나는 청승맞게 울어버렸다. 그땐 그 감정과 눈물이 스스로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워서, 우울증 증상에 대해 한참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두 달 후쯤인가, 코펜하겐의 니하운 운하를 따라 걷다가 우연히 수영복을 입은 남녀가 시체처럼 누워 광합성하는 모습을 보게 됐는데, 또다시 극장 안에서 겪어본 억울한 감정이 울컥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대체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산 것일까?’라는 원망 섞인 한탄이 입 밖으로 처음 튀어나왔고, 아등바등 버텨왔던 사회생활에 대한 깊은 자기 연민에 빠져 들었다. 그 후로 며칠간은 타고난 개미 유전자에 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그 무렵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던 아침 운동을 멈추고, 학교도 부러 잘 나가지 않았다. 내가 저지를 수 있는 무척이나 소심한 반항이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멀리멀리 떠나왔지만 나는 관성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는 개미의 삶으로 서서히 돌아갔던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나는 여행은 인생의 대단한 변곡점을 만들 것처럼 포장되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을 바꾸는 치트키로 쓰이는 건 아니다.
‘퇴사 여행’이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그린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시도해볼 만한 장르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남들이 피곤한 얼굴로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할 때,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매일 새로운 카페와 식당을 찾아다니며 생경한 풍경에 감흥하며 보내는 감상적인 나날을 자랑삼고 싶은 거라면, 굳이 퇴사까지 감행할 필요가 있을까? 나 역시 한번 사는 인생을 오래전부터 주창해온 욜로족이었지만, 요즘에는 그 의미의 주체가 과연 ‘나’인지 수시로 자문해보곤 한다.
입시와 취업 혹은 퇴사와 재입사, 연애와 이별, 결혼과 육아 혹은 이혼 등 인생의 대소사 속에 매몰되어 사는 우리는 때때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좌절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자만하기도 한다. 그렇게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한 편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 인생이니까. 결말을 알 수 없는 삶이라는 이야기 속에 여행이라는 챕터가 과연 얼마 간의 인생의 변곡점을 만들게 될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는 퇴사 후 떠난 일생일대의 장기 여행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한 결정적 계기가 될 줄 알았지만, 그 시간은 결국 꾹꾹 눌러왔던 자기 연민의 감정을 표출하고, 다독이는 시간으로 마무리됐다.
퇴사 여행 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눈 뜨고 감을 때까지 제 살길을 찾아 움직여야 하는 개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퇴사 여행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현실의 낭떠러지 끝으로 나를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 오랜 여행을 통해 남들처럼 똑같은 삶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여행이 인생의 대단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마시길. 겸허히 내가 가진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의 방향을 일깨웠다면 언젠가는 인생 서사의 결말이 달라져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