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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Jan 12. 2023

이토록 평범한 여행

여행과 일상을 오가는 메타버스

"우리 아직 여행하는 거 같지 않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우리 부부는 왠지 모르게 계속 들떠있었다. 단순한 여독이 아니었다. 매달 해외 출장을 다니던 시절에는 일이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부터 앓곤 했는데, 이번 여행은 긴 여정과 날씨 격차에도 불구하고 말끔했다. 음, 이건 메타버스에 가까웠다. 우리 부부를 둘러싼 시공간이 따로 움직이는 것 같은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다. 물론  어수선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우리 둘만 지내는 평범한 하루마다 여행의 한순간처럼 흘러갔다. 태국에 머무는 동안 숙소를 4번이나 이동한 탓인지, 익숙한 집에 돌아와서도 마치 새로운 숙소에 체크인한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끼리 "이 호텔은 침대가 내 몸에 맞네!" 라며 킥킥거리곤 했다. 비록 문밖 뜨거운 태양과 푸른 바다 대신 눈 쌓인 풍경으로 바뀌어있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생활 집기를 맘껏 쓸 수 있는 레지던스 호텔이다 생각하니 뜨끈한 밥과 얼큰한 찌개로 마음껏 현지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빈둥빈둥 동네를 거닐다가 장을 보고, 동네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테니스를 치며 우리는 계속 여행을 이어갔다. 내 집인 듯 아닌 듯 무척 아늑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숙소는 별 다섯 개에 별..(아니지, 여긴 우리 집이잖아! 정신 차려!)


실제로 나는 이런 기이함을 꽤 오래 느꼈다. 수없이 듣고 써왔던, 일상을 여행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여행자의 마음으로 산다는 게 내심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새해가 되니 서서히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뭐라도 이뤄내고야 말 것처럼 희망찬 새해를 다짐하는데, 나만 공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상대적 소외감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느끼는 여행자의 마음을 오래 잡아두고 싶은데, 어떻게 무얼 더 해야 하지. 마치 이별을 감지하고 통보를 받을까 두려워 미리 이별을 연습하는 사람처럼 점점 초조해진 것이다.  사가능하면 오래오래 지금처럼 일상을 여행하고 싶었고, 이번 기회에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체득하고 싶었다. 침내 아바타와 동일시된 제이크처럼.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행동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고요. 서핑을 배우거나 봉사활동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작가의 소설 중에서.  


아무리 대단하고 진귀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더라도 감흥 없이 바라본다면 그건 4k 영상이나 드론 사진보다 못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내 앞의 풍경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달라지는 게 가장 빠른 방법 된다. 내가 여행에서 돌아와 잠시 동안 모든 일상을 생경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건 내 눈이 여행자의 마음으로 치환되었기 때문 것이다.  여행을 다니지 못했던 3년 동안 나는 떠나지 못해 안달이 났었는데, 이토록 평범함 여행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사소한 일상이라도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달콤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비록 지금 내가 구르는 이곳이 개똥밭이라도 눈앞의 풍경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여행의 공백과 간절함이 로 이토록 신기한 메타버스의 문을 열었고 내 눈 앞에 놓인 일상은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 마도 어떤 과학과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행의 마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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