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지만, 어떤 여행은 강렬한 맛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최근 베트남 달랏이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이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들썩이는 걸 보면서, 4년 전 커피로 점철된 우리 부부의 달랏 여행이 떠올랐다. 내가 브런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우리 부부의 신혼여행기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행에 어떤 로망과 흥미도 없는 남자를 데리고 매번 여행을 계획하는 건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이국의 아름다운 풍경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면 되지, 굳이 먼 길을 고생하며 찾아가는 게 여전히 못마땅한 그와 어떻게 해서든 여행의 효용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나의 욕심은 여전히 대립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우리는 함께 떠난다. 여전히 나는 여행이 좋고, 그는 여전히 여행은 싫지만 나와 함께하는 여행에 있어서는 흥미를 갖고 있다. (시간이 되신다면, 여행을 싫어하는 남편과 떠난 첫 여행, 신혼여행지에서 대판 싸운 이야기, '여행을 싫어해도, 괜찮습니다'편을 https://brunch.co.kr/@editor999/4 읽어 보길!)
4년 전, 베트남 달랏을 여행지로 점찍은 건 놀랍게도 내가 아닌 그였다. 커피에 진심인 우리 부부는 달랏에 커피가 유명하다는 얘기에 가장 먼저 꽂혔다. 커피 얘기를 하자면 여행과 마찬가지로,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 커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커피=맥심, 카페보다는 피시방이 더 익숙하고, 어쩌다 카페에 가면 휘핑크림 잔뜩 올라간 모카라테만 마시던 사람이었다. 연애 시절, 내가 성수동에 살고 있던 때라 남편은 얼떨결에 당시 핫한 카페는 모두 섭렵했고, 서서히 커피 맛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 커피에 진심인 내 옆에서 6년 넘게 있는 동안 그는 바리스타 1급 자격증을 따게 됐고, 커피에 관한 지식이 나보다 월등해졌다. 커피는 이제 내가 아닌 그의 소울이 되었다. 다시 돌아와, 우리가 달랏으로 여행지에 대한 합의를 역대급으로 빠르게 이루게 된 건 '커피'라는 공통 관심사 때문이었다. 커피로 시작한 우리의 관심은 프랑스인이 찾는 숨겨둔 휴양지(오죽 좋았으면 커피까지 가져와 심었을까), 유럽풍 건물이 자아내는 이국적인 거리, 사계절 선선한 날씨, 뜻밖의 맛집과 카페, 와인 등으로 이어졌고 '아니, 베트남에 이렇게 완벽한 여행지가 있었는데 그동안 왜 아무도 안 갔지?'라는 의문과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공대생의 기질로 남편은 무언가에 한번 꽂혀 파기 시작하면 거의 논문 수준이다. 매일 퇴근하고 오면 달랏에 대해 읊어대는 남편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치다가 비행기표를 끊는 걸로 내 역할은 끝. 나는 처음으로 여행 준비를 모두 남편에게 맡겼다. 남편은 그날부터 나에게 숙소 리스트를 보내며 컨펌을 요청했고, 엑셀로 일정을 매일 업데이트했다. 스마트폰에 여행 관련 앱 하나 없던 남편의 핸드폰에는 베트남 여행을 위한 폴더가 생성됐고, 거기에는 위기 시(여기에서 위기라는 건, 내가 불평불만을 할 때를 말한다),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남편은 퇴근 후 집에 오면 매일 같이 엑셀을 열어 우리가 달랏에서 먹고, 자고, 마시고, 가야 하는 곳을 채워 나갔다. 끼니마다 메뉴별 옵션이 있었고, 내가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그러니까 그에겐 곧 위기다!) 1순위의 근거리 맛집까지 검색이 완료한 상태였다. 그중 압권은 우리가 가야 할 카페 리스트였다.
실질적으로 달랏에는 4일 정도 머무는 일정이었는데, 가보고 싶은 카페 포함 커피 하우스는 20군데가 넘었다. 어떤 곳은 차라리 한 달 정도 휴가를 내고 와서 커피 농장에서 교육을 받고 싶을 정도로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했다. 달랏의 커피가 특별한 건 베트남 커피 하면 쓴 맛이 강한 로브스터를 떠올리는데, 고지대인 달랏에서는 아라비카 품종의 스페셜티 커피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달랏은베트남 커피가G7의 눅진한 맛이나 단맛에 몸서리치는 연유 커피가 전부일 거라는 내 편견을 깬다. 프랑스 귀족들이 즐겼다는 고급 커피 문화와 우리 부부처럼 커피에 진심인 젊은 사람들이 이어가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카페 문화가 달랏에 숨어 있다. 선선한 고지대의 환경에서 자란 신선한 아라비카 원두와 달랏 특유의 로컬 문화가 합쳐진 카페 문화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대형 프랜차이즈나 베트남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다채로움과 매력을 갖추고 있다.
결론적으로 달랏에 머무는 4일 동안 우리는 12개의 카페에 갔는데, 식후, 식전은 물론 비가 오는 날도, 잠이 안 오는 밤에도 카페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리의 일정은 결국 카페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것이다. 카페만 들어가면, 커피 메뉴는 3개 이상, 디저트 2~3개를 기본으로 주문해 호기심을 해소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일단 시키고 보자라는 마음이었다. 베트남 커피의 상징인 핀 드리퍼로 내린 커피부터 이탈리아산 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을 쓰는 카페, 원두에 맞춰 손수 내려주는 드립 커피까지. 연유 말고도 오렌지, 코코넛, 꿀, 요구르트, 아보카도, 럼 같은 술을 넣은 커피 등 상상하지 못한 커피 메뉴는 맛을 떠나 우리에게 생경한 경험을 안겨줬다.
예능 방송이 나간 이후, 달랏으로 떠난 한국인이 제일 먼저 찾는 곳은 팜유 패밀리가 극찬한 쌀국숫집이라던데 내가 그 방송을 보는 내내 그리워한 건 뜨끈한 고깃 국물이 아닌 빈티지 유리잔 속에 담겼던 생경한 커피들이었다. '제대로 된 카페도 가보지 않고 어찌 달랏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 부부는 때때로 격분하기도 했다. 그들이 무얼 먹든 달랏 카페만 하나둘 떠오를 때 즈음 문득 남편이 입을 열었다. '달랏 커피 농장 기억나지? 거기 지금 커피 수확할 때일텐데, 또 가고 싶네!' 이럴 때 보면 그와 함께 다닌 여행이 영 쓸모가 없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커피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그가 나보다 여행을 더 즐기게 될지 또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