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뿐인데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벌써 2주 전의 일이다. 여느 아침과 다를 것 없이 필라테스를 하고 헬스장으로 내려와 유산소 운동을 하려던 참이었다. 불현듯 모르는 번호로 업무 관련 연락이 오는 바람에 도통 운동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전날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터라, 연말까지 당분간은 겨울 방학이라는 명목으로 좀 쉬어 보려 했는데, 사고는 역시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틈을 파고든다. 사업을 하면서 직장인 때와 달리 시간적 자유를 누리고는 있지만, 업무 시간 외에도 24시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들은 방심한 사이에 보란 듯이 달려든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트레드밀에 이미 올라서 있던 나는 속도를 높여 5km를 채워서 달렸다.
날이 날인 만큼 오랜만에 남편과의 점심 외식에 나섰고, 오전에 날이 선 예민함이 조금 무뎌졌을 무렵. 집에 돌아와 외투를 벗고 주머니에서 차 키, 지갑, 립밤을 차례로 꺼내어 놓는데, 늘 있어야 할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종종 그랬듯 차에 두고 왔겠거니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에 내려가는데, ‘설마’ 하는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예외 없이 안 좋은 예감은 얄밉게도 적중하는 법. 차 안은 깨끗했다. 평소에 물건을 잘 두고 오긴 해도 핸드폰을 잃어버린 건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2시간가량 나의 심장 박동은 오전에 5km를 달릴 때보다 요란하게 날뛰었다. 집에 있는 아이패드와 맥북을 총 동원해 아이폰의 마지막 위치를 찾으려 온갖 시도를 했지만, 행방은 묘연했다(아이폰의 나의 찾기 기능이 국내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핸드폰의 마지막 단상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의 말마따나 제 아무리 값이 나간다 해도 물건은 물건일 뿐. 다시 사면 그만인 것을, 나의 감정은 과도하게 날이 서 있었다. 핸드폰을 찾는 내내 나의 감정은 그렇게 중요한 소지품이 사라질 때까지 전혀 인지조차 못한 자책과 자학에 가까워져 갔다. 잃어버린 물건을 어떻게 해서든 찾겠다는 의지는 부끄러움과 실망감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핸드폰을 잃어버렀다는 문제가 아니라 핸드폰을 잃어버린 ‘나’의 문제로 바뀌어갔다. 옆에 있던 남편은 계속해서 나를 달랬지만, 태연한 척조차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더욱더 미웠다.
산타의 자비였는 지, 핸드폰은 실종 4시간 여만에 내 품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좋은 어르신 부부가 주차장에서 주워 연락을 주셨고, 근처 편의점에 맡겨 주셨다. 내면의 자학이 서서히 잦아드는 듯했다. 핸드폰을 주웠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시 차를 타고 30분,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라 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간절한 마음은 애가 달았다. 핸드폰을 다시 손에 쥔 순간, 지난 몇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긴장이 풀려 버렸다. 외투에 넣어둔 카드 지갑이 사라진 건 아마도 그 시점이었을 것이다. 잃어버렸던 핸드폰을 다시 손에 쥐자,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카드 지갑이 사라진 건 감쪽같이 몰랐다. 나는 왜 그럴까 정말, 집에 와서 샅샅이 뒤져봐도 이번엔 카드 지갑의 행방이 묘연했다. 간신히 되돌아왔던 그 꽉 막힌 도로를 저녁도 거른 채 다시 찾아갔고, 끝내 사라진 카드 지갑은 찾지 못했다. 핸드폰을 찾으러 갔다가 카드 지갑을 잃어버리는 사건의 마무리는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야 종결됐다. 같은 도로를 세 번이나 왕복하면서 버린 시간과 감정 소비는 끝내 눈물로 폭발했다. 내가 울든 울지 않든 산타는 오지 않겠지만, 꾹꾹 참고 있던 자학의 응어리가 못 배길 만큼 차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명품 로고가 박힌 지갑이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누군가 내 카드를 주워 펑펑 쓴 흔적도 없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부주의로 인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 날도 있는 거다‘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핸드폰을 찾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남편의 위로는 머리로는 타당했지만 마음에까지 와닿진 못했다. 내 마음속은 온통 스스로를 비난하는 소리로 쾅쾅 울리고 있었으니까.
다음 날, 언니네 부부와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모였다가 전날의 해프닝을 구구절절 전했다. 극 F인 나와 달리 극 T 성향을 가진 형부가 가만 듣다가 의연하게 반응했다. “그게 대체 왜 울 일이야? 물건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왜 그렇게 괴롭고 힘들 일인 거야?” 핸드폰이나 지갑을 다시 사야 하는데, 당장 구할 돈이 없다면 그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혹은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영화처럼 범죄에 연루되었다거나 한다면 골치가 아픈 일이니까, 근데 뭐 그것도 해결 못할 정도는 아닐 테고... 형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영웅담처럼 어제의 불행을 한탄하고 있던 내가 뻘쭘해져 버렸다. 동시에 ’아, 별 일 아니었네’라는 마음이 들면서 묘한 위로가 되는 게 아닌가. 사실 전날 밤까지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는데, 지갑을 잃어버린 그 순간의 기억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모두가 나를 위로한 날이었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도 몇 날 며칠을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벌했다.
자기비판 자기 연민의 사이에서 나는 중간이 없다. 남들 앞에서 실수를 하거나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극도로 자기비판에 빠지거나 혹은 자기 연민에 찌들어 숨어 버린다. 이미 벌어진 일이나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감정에 붙들려 사건을 과대 해석한다거나 모든 것을 내 탓으로 규정해 버리는 습관은 삶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조금은 너그러워져도 될 나이를 먹었지만, 내가 감히 통제할 수 없는 일들까지도 가혹한 채찍질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건 변하지 않는다. 지난 연말, 나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제자리걸음인 내 모습을 직면하고야 말았다. 기어코 마흔의 경계를 넘어와서도 나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과연 나는 이런 나라도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