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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절대 충분해지지 않을 겁니다.

결국엔,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

by NORE

작년에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말 중 하나는 ‘나의 행동과 말이 다른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든다’라는 것이었다. 내면의 방황이 유독 길게 느껴졌던 작년, 나는 매일이 살얼음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찰나의 휘청거림에도 대지진을 맞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무너졌고,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괴롭혔던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들으니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스스로 감당 못할 불안을 만들고 괜스레 남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당신은 절대 충분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아셔야 해요. 하지만 비교의 잣대를
내려놓으면, 당신의 가치를 깨달을 겁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화제가 된 데미무어의 뜻밖의 소감은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내면의 균열을 겪는 감정들을 글로 다잡아보고자 시작한 이번 연재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아홉 편의 글 속에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자책과 불안이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그래밍처럼 자동 생성되는 ’ 나는 이 나이에 이룬 게 이것밖에 없을까?‘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잘할까?‘ ’나는 결국 또 실패한 건가?’ ’나는 잘하는 게 없어’ ‘나는 너무 게을러‘ 같은 자책의 메아리는 매주 나의 글감이 되곤 했다. 때론 버거웠지만 내면에서 자폭하듯 쏟아지는 자문에 기대어 매주 글을 토해냈다. 마지막 편을 쓰는 지금 돌이켜보니 나를 향한 화살들이 한 곳을 조준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완벽을 위해 끝없이 나를 소진했던 이유도, 그럴수록 무기력이라는 늪에 깊게 빠져 허우적댔던 것도 모든 순간에서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리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충분하지 못하다는 자책과 불안의 근원이 진짜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 성인이 되어서도 안정적인 선택보다는 모험을 즐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길지 않지만, 지금까지 나 스스로 선택해 닦아온 길에서도 남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따른 적이 별로 없었다(그래서 ‘남들처럼‘ 성공하지 못한 건가?). 성공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말인데, 어째서인지 나는 서른 중반까지 성공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고, 명예를 얻고, 남들에게 존경을 받고..음. 이런 것이 진짜 성공인 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무언가를 더 가지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내 가치를 세상이 알아주리라는 순진한 믿음이 굳건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호락호락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게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다. 큰 목표 없이 막연히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쟤 보다 더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왔는데, 왜 이룬 게 하나도 없지?‘라는 마음에 한번 사로잡히자 급격히 불안해졌고, 일상의 작은 선택조차 두려워졌다.


삼십 대가 넘어가기 시작하면(요즘은 이십 대의 성공한 사업가들도 많지만) 서서히 또래의 성과가 가시화된다. 찌질한 이십 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하나 둘 사회적 성공을 이루면서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한 스스로가 유독 애처롭게 느껴진다. 이렇게 한 면 한 면을 남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뜯어보기 시작하면 불행을 자초하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세계적인 여배우가 시상식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면에서 빈 구석만 보이는 것이다. ’남들보다 예쁘지 않아서, 날씬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해서...’ 인간의 뇌는 부정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번 사로잡힌 사고를 부정하는 게 쉽지 않다(코끼리를 절대 생각하지 않기로 뇌에 신호를 보내는 순간 머릿속은 온통 코끼리로 가득 찬다는 사실을 아는 가!). 타인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나는 절대 충분해질 수가 없다. 이미 가진 것보다 잃은 것 혹은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을 부리게 되고, 더 갖지 못한 것에 불안감은 증폭된다. 더 나아가면 그 탓을 남에게 전가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기준으로 평가받지만, 지속적으로 내 삶을 타인에게 비춘다면 끊임없는 비교에 시달린다. 불가피한 사소한 선택조차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삶은 어딘가 텅 빈 내면을 구축할 뿐이다.


내 삶을 타인에게 내어주지 않으려면 의식적으로 매 순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마흔이 되어서야 새롭게 배운다.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데미무어의 소감에 깊은 공감을 한 것을 보면 결국 국적, 지위, 나이를 막론하고 인간의 본질적 고민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길을 찾는 것’ 이란 생각이 든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배우가 같은 고민을 했다는 게 인간적인 위안이 되었으리라).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일 테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에서 주인공 계나는 ‘행복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게 쓰이는 것 같다‘ 라는 말을 하는데, 타인의 잣대를 거두고 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각자의 행복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영화 속 계나처럼 그저 춥지 않고 따듯하기만 하면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행복일 수 있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마흔이 될 때까지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깎아내리는 습관적 사고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대략 두 달 동안 글을 쓰면서 매주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고, 오랜 시간 내면을 뒤흔든 불안과 자책이 수동적인 삶에 기댄 탓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다움‘을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은 모든 순간, 모든 선택의 기준이 ‘나’여야 한다는 사실. 타인의 잣대를 내려놓으면 나의 가치가 조금씩 선연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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