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 Oct 17. 2023

어떤 시작도 늦지 않았다

글쓰기 딱 좋은 나이

장을 보고 집에 오는 길,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길지도 않은 신호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쯤 우연히 건물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에 눈길이 갔다. 양손에는 삐져나온 야채가 가득 든 검정봉투를 쥐고, 무릎 튀어나 온 트레이닝 복을 대충 입은 꼴이 오늘따라 참 보기 싫었다. 공교롭게도 내 옆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서있었다. 한 껏 꾸며 입은 채 머리도 깔끔하게 세팅되어 있는 그녀는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잘 정리된 눈썹이며, 깨끗한 피부톤이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그녀와 같이 횡단보도를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지만 나의 기분은 울적하기만 했다.


집에 와서 장본 것을 정리하고 한 참을 앉아있었다. 너무 내가 퍼져있다는 생각이 속을 시끄럽게 했다. 나는 분명 아침부터 바쁘게 아이 등원을 시키고, 동네인기 야채가게 오픈런에 성공해 기분이 좋았었는 데 말이다. (우리 동네 최고 인기 야채 가게는 대단히 저렴한 가격으로 하루 세 시간만 장사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명품관이나 귀한 운동화를 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고들 하는 데 나는 고작 야채가게 오픈런에 행복하고 있었다. 절약하는 내가 평소에는 대견했는 데 희한하게 오늘만큼은 초라하게 느껴졌다.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져서 걷기로 했다. 물 한 병만 챙겨서 집 근처 산으로 향했다. 나는 산을 참 좋아한다. 자연 속을 거닐다 보면 잡생각도 사라지고, 희망적인 생각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나는 산만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열심히 산을 오르다가 오늘따라 평소에 도전하지 않았던 조금은 가파른  길로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계속 가는 길보다 새로운 길이 잡생각 떨치기에는 제격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오전 산행을 거의 끝낸 시간이라 혼자 오르는 초행길이 조금 겁이 났다. 그래도 정신없이 땀을 많이 흘리고 싶어 좀 가파른 길을 선택했다. 한 참을 오르다가 역시나 길치인 나는 헤매기 시작했다. 괜스레 최근 혼자 산을 오르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 사건이 뇌리에 스치기도 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저기 죄송한 데 이길로 가면 정상 맞나요?"


"..."


돌덩이에 걸터앉아 팩소주를 들이켜 할아버지는 내 말을 잘 못 들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할아버지의 차림새나 술냄새 때문이지 괜히 경계를 하게 됐다. 수상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주변에는 이 할아버지 밖에 길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이 이 정상가는 길 맞을까요?"


나는 재차 물었다.


"아이고 젊은 처자, 이 길 아니야. 왔던 길로 다시 쭉 가면 갈림길이 나올 거야. 거기 왼쪽길로 올라야 정상이야. 이 길은 옆 동네로 넘어가는 둘레길이야."


할아버지는 내 경계심이 미안할 정도로 환하게 웃으시며 길을 안내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그래. 젊은 처자 열심히 봐. 산 좋지. 혼자도 씩씩하네"


할아버지는 마치 나를 손녀 보듯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었다. 나도 괜히 활기 넘치고 젊은 여성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산행을 이어갔다. 괜히 발걸음도 산뜻해졌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젊은 여성과 비교하며 내 인생이 마치 저물어 버린 것처럼 우울해했었는 데 신기할 노릇이다. 할아버지 눈 에는 내가 아직도 창창한 나이로 보였던 거다. 생각해 보면 내 나이 서른여덟, 어떻게 생각하는 에 달렸다. 백세시대에 고작 38년 걸어온 거다. 뭐가 그리 늦은 나이라고 움츠러들었는지 모르겠다.


최근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10년 차 전업주부에서 전업작가가 되어 보겠다는 목표를 가슴에 새긴 것이다. 나에게는 이 목표를 밖으로 꺼내놓는다는 것만 해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오랫동안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저 잡히지 않는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 육아에 찌들었을 때, 드라마만 봐도 나도 저런 극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너무 늦었다고 단념했다. 간혹 술에 잔뜩 취해서 '이렇게 죽는 다면 난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피어나면 매번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고 말이다. 항상 가슴에 품은 것은 하나였는 데, 한 발짝 내딛는 것이 힘들었다. 항상 내가 부족해 보였고, 나의 시간은 이미 늦어버렸다고만 단정해버린 것이다. 바보같이 내 나이에 무언 가 시작하기에 늦었다고만 생각했다.


<종의 기원>, <28>로 유명한 소설가 정유정 작가도 41세에 등단을 했고, 극작가 세르반테스도 58세에 명작 <돈키호테>를 써냈다. 내가 사랑하는 박완서 작가도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고 한다. 내 나이는 고작 서른여덟인데, 도전을 무서워만 하고 있었다. 도전하기 늦은 때라고만 생각했는 데, 생각을 달리해 보면 꿈꾸기에 늦은 나이란 없는 것이다. 내 필력이 지금 비록 형편없을지라도 오늘부터 당장 몇 시간씩 꾸준히 글을 쓰다 보면 달라질 것이다. 내 나이 마흔이고 오십이 되어있을 때는 지금보다는 사람들한테 읽히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여전히 글쓰기를 무서워하고, 도전을 멈춘다면 나는 또 10년, 20년 후에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어떤 시작에 늦은 나이란 없다. 심지어 나는 글쓰기 딱 좋은 나이에 전업작가를 꿈꾸고 있지 않은가. 나처럼 무언가 가슴속에 품은 것이 있다면 일단 시작해 보자.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지 않은 가.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니 힘을 내어 봐야겠다.

이전 14화 이 결혼의 끝을 잡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