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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준 Jun 25. 2024

술도 원샷하고, 인생도 원샷하고!

묘비 문구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

술은 대표적인 기호 식품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삼십 중반까지 내 주량을 전혀 늘리지 못했다. 소주 세 잔! 거 참, 많이도 마신다. 와인과 막걸리는 그것보다 더 못 마시고. 보통 술을 못 마시면 술을 싫어한다는데, 나는 그렇지만은 않다.

장염에 걸려 병원에 갔을 때였나.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병원에 갔을 때였다. 의사가 대뜸, “술은 안 하시죠?”라고 물었다.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척추반사로 대뜸, “술이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나요!” 하고 말았다. 말만 들으면 타고난 주당, 역전의 용사인 줄 알았을 게다. (아, 다만 지금은 조금 더 주량이 늘었다.)

평소에 느끼기는 어려운 알딸딸한 기분. 위를 바라보면 몸이 기분과 함께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날아다니는 듯하다. 아래를 바라보면 어질어질 한 게 땅바닥과 금방이라도 붙을 것만 같다. 왠지 다 잘 될 거 같으면서 다 잘 안 될 것 같은, 감정의 고저가 나를 덮친다.

옛날 사람들도 술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비석 글귀에도 증거로 잘 남아 있다. 

    

이 무덤은 ‘수많은 잔을 비웠던 사나이’, 아르카디온의 것
도시로 가는 길옆에, 아들 도르콘과 카르밀루스가 세우다
이 사나이는 죽었다
독한 와인 여섯 잔을 원샷하고서

_아르카디온.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인.    

  

고대 그리스인인 아르카디온은 와인을 연거푸 원샷하다가 인생도 원샷했다. 아들 도르콘과 카르밀루스는 그 자리에 있었을까?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마침내 올 일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의 정확한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아르카디온의 술 사랑과 ‘죽음의 원샷’을 묘비에 남긴 것도 그들이다.

예전 같으면 나는 이런 죽음은 개죽음이라고, 너무도 멍청한 사람이라고, 수명을 다 못 누린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는 그런 마음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운명이지 않았을까. 여섯 잔을 원샷했던 것이, 혹은 비슷하게 마셨던 날이 꼭 그 날 만이었을까. 전에도 괜찮아서 오늘도 그렇게 마시는 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또, 그 죽음은 정말 나쁜 죽음이었던 걸까. 어쩌면 술을 사랑하는 아르카디온에게는, 죽은 줄도 산 줄도 모르는 채 취해 간 저세상행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게 아닐까.     

술을 진탕 마시고 죽은 아르카디온과는 달리, 억울한 죽음도 있다.      


여기 햄프셔 그레나디에르가 평화롭게 잠들다     
살짝 차가운 맥주를
찔끔 마시고 죽었네     

군인들아
햄프셔의 추락사를 보고
교훈을 얻으라     

더울 때에는
독한 술을 왕창 마시든지
아예 마시지 마시라

_햄프셔 그레나디에르. 영국인. 영국 햄프셔주 윈체스터. 군인.     


햄프셔는 혈중 알콜 농도가 치사량에 이를 정도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약한 술을 찔끔 마시고서 발을 헛딛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아, 운명이여! 술을 조금 마셔도 죽고 술을 많이 마셔도 죽으니 어쩌란 말인가!

아, 아예 마시지 말아야 하나? 이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까 해서, 고대 그리스인은 자기 묘비 문구로 음주 행위 변호에 나섰다.


술을 그렇게 마시고서 망자가 되었구나
아나크레온이여!     
그러나 나 아나크레온의 인생은 기쁨으로 빛났다     
술을 마시지 않은 당신도
결국에는 무덤으로 가야 할 걸

_아나크레온.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무덤으로 가는 건 똑같은데, 그렇다면 기쁘게 술을 마시자! 위대한 아나크레온이여, 대단하신 성찰이십니다!

아나크레온의 권고를 받아들여, 저녁에 술을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사실 나는 올해부터 ‘소주로 혼술하기’를 시작한 참이다. 최소한 불쌍한 군인 햄프셔 그레나디에르처럼은 되지 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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