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 문구로 보는 평범한 사람들
케이의 사탕 레시피
초콜릿 두 조각과 버터 2테이블스푼
약불에서 녹이며 저어 준다
우유 1컵을 넣고 다시 끓인다
설탕 3컵, 바닐라 1테이블스푼, 소금 한 꼬집을 넣고
온도가 약 112도에서 118도 사이가 될 때까지 졸인다
대리석 판 위에 부은 뒤
식히고, 깬 다음, 먹는다
케이가 어딜 가든
웃음이 따라다녔다
_마사 캐서린 커컴 앤드루스. 미국 유타주 로건. 1922-2019.
이 연재는 평범한 사람들의 묘비 문구를 다루는 시리즈다.
무슨 말인가? 위의 레시피는 엄연한 묘비 글귀다!
엄숙한 선언도, 재치있는 유머도, 간단한 신상정보와 일대기도 아니다.
마사(별칭 "케이"), 또는 그녀의 가족들은 묘비에 마사가 가족들에게 해줬던 사탕 레시피를 적었다. 특이하다고?
이런 비석은 하나뿐이 아니다.
엄마의 크리스마스 쿠키
크림으로 설탕 1컵, 1/2컵 마가린
달걀 2개를 풀어서 저어주고, 바닐라 1티스푼을 추가
밀가루 3컵, 베이킹파우더 3티스푼, 소금 1티스푼을 추가
번갈아가며 아까 만들어둔 크림 1컵을 추가한다
밀가루와 같이 휴지시켰다가 반죽해준다
오븐에서 162도 정도로 구워준 뒤 프로스팅한다
_맥신 캐슬린 멘스터. 미국 몬태나주 캐스케이드. 1926-1994.
맥신의 비석 문구는 자녀가 쓴 게 확실해 보인다. 명절마다 부모님이 해주던 레시피. 맛이 보장되어 있는 레시피면서도, 내가 하면 그 맛이 정확히 나지 않는 레시피. 아마 매번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가족들은 그 쿠키맛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류의 묘비 문구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인지, 외국의 한 일반인은 가족 묘비에 쓰여 있는 레시피대로 요리를 해서 쇼츠에 업로드했다고 한다. 그러자, 자기 가족 묘비의 레시피도 요리해 달라는 요청들이 들어와 몇 차례 연속 요리를 했다고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요리는 즐겁다.
물론 나는 필수적으로 매일 요리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삼시세끼를 다 가족들에게 요리해 주어야 하는 전업주부 입장에선, 즐거움보다는 노동의 귀찮음, 메뉴 선정의 고민, 요즘 같은 날씨면 덥고 습한 날씨로 인한 곤란 등이 생각날 터다.
맞벌이 부부 집의 요리에도 비슷한 고충이 있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을 보면, 요리를 원래 하던 남자든 하지 않던 남자든 결혼한 이후론 하나 같이 요리를 열심히 한다. 한 친구는 아이가 와이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자신이 요리를 도맡아 한다고 한다. 또다른 친구는 (내가 보기엔) 쓸데없이도 '너는 주방에 들어오지마!'라고 하는 바람에 요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데(와이프가 요리를 만화 캐릭터 느낌으로 못하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요즘 들어 슬슬 지치는지 밀키트를 요리하는 빈도가 늘어난 것 같다.
매일매일 닥쳐오는 요리란 숙제를 하는 이유는 그래도 단순한 의무감만은 아닐 터. 여기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다. 나는 어머니가 무친 취나물과 고사리 나물, 도라지 무침을 좋아한다. 어머니의 나물 맛의 변천사를 알기에 더 좋아한다. 식구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맛있어 지기 위한 숱한 과정을 알고 있어 더 좋아한다. 식탁에도 자주 올라온다. 어지간히도 부지런하다. 어머니의 레시피를 꼽으면 이것들 가운데 고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파스타를 가장 쉽게 요리하는데, 아마 어머니에게 내가 한 마음에 드는 레시피를 꼽아달라고 하면 태국 면 샐러드인 '얌운센'일 것이다. 집 나물처럼 따스한 느낌이 드는 음식은 아니다. 집에는 한식을 잘 조리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조금 색다른 요리들로 포지션을 잡아보자고 생각해서 선택한 요리들 가운데 하나였다. 꿈꿈한 피시소스 향에 새콤달콤하면서 적당히 매콤해서 입맛을 돋우는 매력이 있다. 집에는 비밀(?)인데, 같은 소스를 공유하는 태국식 볶음밥도 집안 식구들은 맛있게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머니의 나물을 떠올리듯 어머니가 나의 얌운센을 떠올리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 나도 부모님이 아닌, 나의 가족들에게 마음 따스해지는 요리를 해주게 될까? 그들은 나의 어떤 레시피를 문득 떠올리게 될까? 뒷날의 즐거움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