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구월 사일 씀 (이십이 년 삼월 일일 발행)
[ *본 글은 비혼과 결혼 사이에서 고민하고, 자식은 낳을 생각이 없는 30대 청년이 미래에 태어날지도 모를 나의 아이에게 ( 더 넓게는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에게 )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 콘셉트의 글입니다. 혹은 지금 내가 나의 어른에게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
2020년 9월 4일, 너에게 쓰는 편지.
1
아마 네가 읽는 교과서 어딘가에 2020년을 기록하는 최악의 단어로 '코로나19'가 올라가 있을 것 같구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외출을 할 때 흰색, 검은색, 손으로 만든 형형색색의 마스크를 모두 하고 나간단다. 오늘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수도권을 기준으로 2단계에서 2.5단계로 1주일가량 연장이 확정되었다.
제발 원하건대, 네가 살아가는 그때의 마스크는 병원에서 위생을 위해서 사용하거나 전염 가능성이 있는 병을 가진 사람들이 옮기지 않기 위해 선별적으로 장소나 상황에 구분하여 쓰는 물건이었으면 좋겠다.
2
대기, 2순위, 예비, 탈락, 불합격 이런 단어 앞에서 무너지지 말아라.
언제나 상대적인 가치 앞에서 무릎 꿇지 말고, 나의 가치를 반겨주는 곳, 나를 필요로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서 너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반대로 합격했거나 내가 선택되었다고 해서 너무 기쁨에 도취하지도 말아라. 합격했던 그곳에서 누군가는 떨어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누군가는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타인의 순간의 결정에 목매지도 말고, 멀리 내다보아라. 기회는 또 언제든지 열려 있다. 타인의 결정에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지도 말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말아라. 너의 가치는 너만이 결정할 수 있고, 그러므로 그 가치는 네가 높일 수도 낮출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의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권한이 주어지게 되었을 때는 꼭 그때그때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된 사람보다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고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타인의 순간의 결정에 무너지고 상처받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기쁨보다는 슬픔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Comment.
20년에 썼던, 브런치 저장 글에 묵혀뒀던 글.
22년 현재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은 정말 소름. 젠장. 20년의 나는 코로나가 22년까지 갈 거라고 생각도 못했을 텐데. 도대체 언제쯤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때의 나는 취업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거듭되는 낙방에 좌절하고 있었나 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면접관에게 화가 나 있었고, 분을 삭이지 못하며 불어나는 슬픔을 어찌하지 못했던 때였나 보다. (글도 구구절절 쓰면 구차해질 것 같아서 적당히 끊은 것 같다.)
정말 웃긴 건, 아이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하며 쓰니 평소 내 말투가 아닌 다정하게 타이르는 말투로 쓰게 되었다는 것. -단다. -같구나. -좋겠다 등. 어색. 어른인 척하려는 말투. 이렇게 말투부터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
이 글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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