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음도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
귀찮음은 죄악일까? 세상의 많은 훌륭한 분들이 귀찮음을 '싸워 이겨야 할 적' 정도로 묘사했다. 덕분에 우리는 귀찮음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나도, 당신도, 저기 지나가는 저 사람도, 모두 귀찮음의 노예라는 것을.
이미지 속의 두 문장은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신용카드와 예능 등의 광고문구로도 쓰였다. 가히 국민적 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가면 '귀차니즘'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굳이 단어의 뜻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직관적이며, 보편적으로 쓰인 단어다. 무려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귀찮음은 모두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왜 우리는 모두가 느끼는 이 귀찮음이라는 정서를 이겨내려고만 할까.
귀찮음은 사람을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든다. 때문에 '오늘 해야 할 일'은 종종 '내일 해도 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내일의 나는 언제나 오늘의 나를 저주할 수밖에 없다.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 오늘의 나는 나 대신 화살을 맞을 대상을 내 앞에 세운다. 그렇게 귀찮음은 천하의 몹쓸 놈이 되어버린다.
귀찮음이 위대한 발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영웅 설화는 이제 식상하다(따지고 보면 토스터기가 그렇게까지 위대하지도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있다.
"귀찮음이 발명을 가능하게 했다고? 귀찮음이 발명의 동기가 되었다고?"
귀찮음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든다. 지금도 슬슬 읽기 귀찮아져서 단어 위주로 휙휙 넘기고 있는 건 이 글의 조악한 완성도가 아니라 본인의 귀찮음 때문이다(아마도). 귀찮음은 어떻게 동기로 기능하게 되었을까. 애당초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고등학교 사회문화 시간에 배운 내적동기/외적동기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잠시 되짚어보자면, 동기는 내적동기와 외적동기로 나눌 수 있다. 내적동기는 성취감, 자부심 등 내재적인 행동 요인이고, 외적동기는 사례금, 상품 등 외부적인 보상이 행동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성취감, 사례금은 행동의 원인보다는 결과에 더 가깝다. 조금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은 매슬로우(Abraham Harold Maslow)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 유명한 욕구단계 이론이다. 인간의 욕구는 아랫단계에서 시작해 그것이 충족될수록 윗 단계로 올라간다는 내용이다. 이 이론은 1970년대에 등장해, 아직도 수많은 개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감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귀찮음에 대한 단서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보다 최근에 있다. 현재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이자 심리학자인 토리 히긴스(Tori Higgins)는 인간의 동기를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했다. 바로 접근동기와 회피동기이다
접근동기는 무언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하고, 회피동기는 무엇인가 좋지 않은 것에서 벗어나고자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예를 들어, 과제 혹은 업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해보자.
1. A는 주어진 과업을 멋지게 수행하고 싶다.
2. B는 주어진 과업을 망치고 싶지 않다.
A는 접근동기를 가지고 과업에 임한다. 반면, B는 회피동기를 가지고 임하고 있다. 결과는 어떻게 달라질까? 우리가 우선적으로 주목할 것은 성취도가 아니다. 둘 다 좋은 성취를 보여주었다고 가정해보자. A는 큰 기쁨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B가 느끼는 정서는 기쁨과 행복이라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B가 느낄 정서는 안도감이다. 실패했을 경우? A는 아쉬움과 슬픔을 느끼겠지만, B는 패배감 내지는 불안을 느낄 것이다.
여기서 귀찮음이 동기로 작용하는 것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귀찮음은 회피동기와 궁합이 좋다. 우리는 더 큰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행동한다. 훗날에 올 어마어마한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당장의 귀찮음을 이겨내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무릅쓰는 것이다.
훗날에 올지도 모를 큰 병이나 사건사고는 어마어마한 귀찮음을 초래한다. 그래서 지금 묻고 따지는 게 귀찮아도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다. 오늘 선생님이 내준 숙제가 너무 귀찮다. 하지만 숙제를 안 해왔다고 추궁받고 혼나는 것은 더더욱 귀찮다. 공감한다면 당신은 숙제를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내일 혼나는 것이 숙제를 하는 것보다 덜 귀찮은 사람이라면 결국 오늘은 숙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움직이기가 너무 귀찮다. 하지만 내일 아침 토스트를 굽기 위해 팬에 기름을 두르는 것은 훨씬 더 귀찮을 것이다. 귀찮지만 토스트를 편하게 굽기 위한 기계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귀찮음은 이렇게 해서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접근동기는 기쁨과 아쉬움을, 회피동기는 안도와 패배감을 느끼게 한다. 어쩐지 접근동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못하지만 말자.'라는 생각보다 건강해 보인다. 회피동기와 친한 귀찮음은 이렇게 죄악처럼 치부되고 말았다. 그러나 접근동기는 좋은 것이고 회피동기는 나쁜 것이라는 흑백논리는 곤란하다. 회피동기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심지어 회피동기로 접근해야 성취도가 오르는 경우도 많다. 동기는 정서, 시간, 사고과정 심지어 신체반응까지, 많은 요소들과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주어진 일에 따라 어울리는 동기의 차원이 다르다. 마감이 3시간 남은 숙제는 '본질을 꿰뚫어 멋지게 완성해야지.'라며 접근동기로 다가가면 제시간에 완수할 수 없다. '시간 내에 제출해야만 한다(제출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회피동기 차원에서 임해야 한다. 과제 제출이 10분 남았을 때 미친 듯이 손이 빨라지는 것은 '시간 초과'를 피하기 위해 회피동기로 임한 덕분이다. 보통 꼼꼼함을 요하는 단기 작업은 회피동기로 임할 때 능률이 올라간다.
문제는 귀찮음이 핑계로 기능할 때 발생한다. 이따금 우리는 '귀찮다'는 말을 '그냥'과 같이 의미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그냥 귀찮아서'라고 두 단어가 붙으면 최고의 핑곗거리가 된다.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미루면서, "그냥, 귀찮아서."라고 말하고 있었다면 곰곰이, 그리고 솔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 오로지 귀찮아서 그 일을 미루고 있었는가? 그 일에 대한 열정이, 노력이 부족하거나 실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완벽하게 성취하지 못할까 봐 두렵지는 않았는가? '귀찮아'가 핑계로 쓰이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멈춰있게 된다.
우리 사회는 회피동기를 자극하면서 접근동기를 강요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 "지금 저축하지 않으면 노후에 불행해진다." 모두 회피동기를 자극하는 말이다. 그러나 "굶지 않기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세요."라거나, "쫓기듯이 하지 말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노려봐."는 접근동기 측면에서의 시각이다. 하지만 접근동기가 어울리는 일과 회피동기가 어울리는 일은 각각 다른 영역이다.
귀찮아도 된다. 귀찮다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당신도, 나도, 방송에 등장하는 그 대단한 사람도 일상적으로 귀찮음을 느끼고 산다(유노윤호님은 제외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결국에는 행동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회피동기가 어울리는 일만큼, 접근동기와 친한 일들도 많이 있다. 특히, 일을 마치고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면, 멀리 보고 가져가야 하는 일이라면 접근동기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다. 접근이든 회피든, 당신의 동기는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고,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당신은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있는가? 혹시 벌써 행동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행동을 탓하기 이전에, 스스로 어떤 동기를 가지고 행동에 임했는지 생각해보자. 생각보다 사소한 차이가, 생각보다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