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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자 에딧쓴 Aug 12. 2024

사과를 하고도 나락에 가는 사회

나락 탈출을 위한 심리 프로파일링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는 너무 딱딱한 것 같고,

"내일 뵙겠습니당"은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내일 뵙겠습니닷"이라고 쓰는 편입니다.


'무슨 저런 쓰잘데기 없는걸 고민하냐',

'고민한 결과가 고작 저거냐'라고 생각하실 것 같긴 합니다만 하하


원래부터 단어의 뉘앙스에 민감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공으로 심리학을, 그중에서도 범죄심리학의 진술분석을 해버리고

일은 UX라이팅을 해버리니, 표현에 너무 예민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UX라이팅은 '확인했어요/확인했습니다/닫기/오늘 그만 보기'를 가지고

하루종일 고민하는 그런 요상하고 집요한 작업입니다.)


민감도라는 녀석은 높다고 해서 마냥 좋은 능력치는 아닙니다.

게임을 했던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마우스 민감도가 너무 높으면

마우스를 조금만 움직여도 커서가 너무 멀리 날아갑니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빠르게 움직이기가 어렵고요.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예민하면 신경 쓸게 많아져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고요.

너무 둔감하면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이 느려져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거칠고 험난한 곳이니까요.


유튜버들에게 이 민감도는 곧 '나락감지 센서'가 됩니다.



용서가 인색해진 사회


캔슬컬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직역하면 '제거 문화' 정도로 해석된다고 해요.

어째 조금 무서운 번역이긴 합니다.


누군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용서받고 회복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문화를 말합니다.

소위 '나락에 간다'라고 하지요.


올해는 거의 일주일에 한 명씩 나락에 가는 걸 목격한 것 같습니다.

매주, 매 달마다 어떤 유명인의 잘못이 도마에 올랐던 것 같아요.

기사가 쏟아지고, 댓글에는 비판을 넘어 비난과 조롱이 가득합니다.


논란을 발판 삼아 성장하는 누군가도 있겠지만,

활발하던 활동을 잠정 중단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둘 중 하나겠지요.

인플루언서들의 도덕적 민감도가 둔감해졌거나,

사람들의 도덕적 민감도가 높아졌거나.

저는 후자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일침을 놓고 싶어 하는 댓글이 정말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어떤 문제는 트집이 아니라 정말 '지탄받을 만한 행동'인 경우도 있고요.

경솔한 언행이 대부분이라고 봅니다.

말을 할 당시에는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영상이 공개되고 나니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경우요.

굳이 특정 채널, 특정 인물을 언급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사건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들 입장문을 내놓고, 해명을 하고, 사과를 합니다.

오죽하면 밈이 되어버렸지요. 초췌한 얼굴, 손질되지 않은 머리, 검정 옷, 검정 썸네일.

화면 앞에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유튜버.

하도 조리돌림을 당하다 보니, 이제는 사과문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같네요.



문제는 이 사과문이 글로 되어있다 보니,

영상만큼 뉘앙스 전달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겁니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차이로 어감이 많이 바뀔 수 있으니까요.

한국어는 특히 어감이 미묘하고 다양한 언어입니다.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표현도 엄청 다양한데(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누렇다, 누리끼리하다...)

심지어는 표현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정도도 다릅니다.(다음 중 가장 샛노란 색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과를 하고도 나락에 가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과를 영상으로 직접 나와서 할 때보다,

사과문이 글로 되어 있을 때 더 엄격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탓도 있다고 봅니다.



'잘 쓴' 사과문?


기업도 예외는 아닙니다. 

개인이 아닌 브랜드의 계정이라면 논란이 있을 때 글로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해집니다.

기업이라면 분명 대응팀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조직적으로 대응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허술한 사과문도 많았습니다.


큰 조직이 아니라면 위기관리 전담팀이 아니라 마케팅/홍보 팀 쪽에서 대처를 하겠지요.

나름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많이 써봤을 전문가들일 텐데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사과문의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쓴 사과문을 쓰려고 할수록 표현에 신경 쓰게 됩니다.

'사과문에 들어가면 안 되는 표현'의 목록도 있을 정도니까요.


사과문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잘 썼는지 완성도보다, 실제로 사태를 잠재울 수 있는지가 본질이니까요.

좋은 사과문은 ‘들어가지 말아야 할 표현이 없는 사과문’이 아니라,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 모두 들어있는 사과문’입니다.

표현적으로'만' 완벽한 사과문은 

오히려 AI가 쓴 것 같다는 오해와 조롱을 받습니다.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은 '표현'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은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표현이 없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표현이 들어간다고 해서 무조건 용서받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과문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해소해주어야 합니다.

사건으로 인해 자극받은 감정들이요.

여론의 감정과 심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사과문을 제대로 쓸 수 있습니다.



캔슬컬처 이면의 뒤틀린 쾌감


캔슬컬처 이면에는 쾌감이라는 심리가 있습니다.

뒤틀린 쾌감이라는 표현이 좀 거창한 것 같은데,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조롱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가장 손쉽게 우위에 설 수 있는 행위거든요.

건강하지 못한 자기방어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도덕적인 민감도가 높아진 것보다,

마음이 병든 사람이 많아진 것이 캔슬컬처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여유가 없거나,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것으로 자존감을 채우거나,

현실의 불안을 잊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요.


아니, '그런 사람이 많아졌다'라는 표현보다는

'많이 보이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저는 유튜브에서 영상을 볼 때, 꼭 댓글도 같이 보는 편이거든요.

댓글에서 내가 놓친 내용이나 다른 관점을 발견하는 것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닐 거예요.

심지어 댓글창을 먼저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댓글이 곧 다수 여론이라고 생각해버리기도 하는데요.

사실 조회수 대비 댓글의 비율을 생각해 보면, 댓글이 다수여론이 아닌 경우도 많을 겁니다.

댓글은 보통 남기는 사람이 여기저기 남기고,

댓글을 잘 쓰지 않는 사람은 아예 작성하지 않거든요.

댓글창의 여론은 '댓글을 다는 유형의 사람'들의 여론입니다.


만일 사과문을 써야 하는 상황이시라면,

조롱과 비아냥을 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시길 권합니다.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조롱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과문은 읽지도 않을 수 있어요.

조롱 자체가 목적이거든요.



나락 심리에 대한 프로파일링


나락에 가기 직전에 바라봐야 하는 사람들은

댓글창에 보이지 않는 다수의 이성적인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보이는 조롱 이외의 반응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댓글들에 담겨있는 심리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댓글에서 심리를 읽어낼 수 있어야,

사과글에도 내 진심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둘 다 감정을 텍스트 형태로 전달하는 일이니까요.


설득, 협상과 마찬가지로 사과도 심리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을 담아 전자책을 작성해 봤어요.

39페이지, 약 3만 자 분량입니다. 

(이 글이 여기까지 약 3,700자입니다.)


사과문 쓰는 법이 아니라 심리 프로파일링입니다.

스킬이나 방법론이 앞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방법론은 결과물일 뿐,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사과문에 들어가야 하는 것'보다

그것들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자신의 상황에 맞게 변형해서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사실 전자책은 '지금 당장 따라만 하면 되는 ~하는 법' 같은 류가

판매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법보다는 물고기가,

물고기보다는 생선요리가 더 잘 팔리는 시장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없는 본질을 다루려고 해 봤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무조건 된다'는 무책임한 약속을 하는 것도,

어떻게든 등 떠밀어 '한 발짝'만 가게 한 뒤

앞으로의 상황에는 무책임한 책, 강의 등도 싫어하거든요.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사과문 쓰는 법(템플릿 포함)>이라고 만들어버리면 그런 느낌이 것 같았습니다.

<무조건 먹히는 사과문 예시 100종> 같은 건 유용할 것 같지만 정작 내가 써먹기는 어렵잖아요.


그래도 최대한 쉽게, 가능한 실용적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사업을 잘하고 있는 친구는 저보고 '아직도 학자마인드'라고 하더라고요.

조금 더 '장사꾼 마인드'를 갖춰보라고 합니다.

소위 '돈 냄새'를 잘 맡는 감각은 따로 있다는데

그쪽 감각은 영 없나 봅니다.


큰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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