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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자 에딧쓴 Jul 30. 2019

뽁뽁이는 존재한다. (2/2)

포장용 에어캡의 쓸모

 당신은 행위의 결과와 과정 중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대해 결과도 과정도 아닌 동기가 중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의 윤리학을 통해, 목적과 수단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켜보자. 그는 '무조건적인 명령'을 도덕 법칙으로 제시했다. 무조건적인 명령이란, 명령 그 자체가 목적인 명령을 말한다. 이 명령은 어떠한 결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며,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지도 않는다. 이를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반면 때와 장소 등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명령도 있다. 이를 가언명령이라고 한다. 가언명령은 어떠한 결과를 얻기 위함이거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우리는 뽁뽁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은 '아이를 구해야 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는 구조될 것이다. 결과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아이를 구하는 동기에 질문을 던진다. '아이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아이를 구해주면 보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등 어떠한 결과를 얻거나 조건이 붙으면, '구해야 한다.'는 문장은 가언명령이 된다. 위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그 아이가 나와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은 아이라면?', '아이를 구출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다면?' 등의 가정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아이를 구하는 이유가 어떠한 다른 목적의 달성이어서는 안 된다. 즉, 구조행위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를 구해야 한다.'가 그저 '그래야 하기 때문에'라는 정언명령이 될 때, 그를 구조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뽁뽁이를 터뜨리는 행위는 무엇인가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을 이야기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상상한 뉴턴처럼, 칸트도 멍하니 앉아 뽁뽁이를 터뜨리다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뽁뽁이는 칸트보다 200년 뒤에 탄생했다.


 칸트는 인간을 대할 때에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인과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다 보면, 맺어지는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 상호 수단적일 수밖에 없다. 칸트도 이 점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단으로 대하는 동시에, 상대방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수단이 되는 대상은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대상은 존재만으로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전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단은 소유와 관련되고 목적은 존재와 관련된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칸트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서 꽃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의자 등의 다른 사물과는 달리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의자는 '앉아야 한다.'는 목적 아래 앉을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꽃은 어떠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꽃은 아름답다. 존재 자체가 그 목적이 되는 것이다.


달, 별, 꽃, 웃음, 농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은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대부분 목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물은 우리에게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뽁뽁이는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때 상품 보호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다한다. 어쩌면 뽁뽁이는 우리가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얼마 되지 않는 사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뽁뽁이가 현대사회의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뽁뽁이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내용이 뽁뽁이의 존재와 의의에 대한 것이라면, 이제는 뽁뽁이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보자.


 4월의 신촌에서, 딴짓박람회라는 축제가 열린 적 있다. 축제의 한 구석, 딴짓놀이터에는 뽁뽁이 터뜨리기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나가던 누구나, 신촌 거리 한복판에 앉아 뽁뽁이를 터뜨리며 저마다의 생각에 잠기거나 멍을 때렸다. 딴짓박람회의 취지는 저마다의 삶에 쫓겨 쉴 틈 없이 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딴짓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딴짓이 우리에게 주는 휴식과 활력을 전하고자 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이 정해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에 익숙하다. 무한 경쟁의 교육체제 안에서, 휴식과 딴짓은 죄악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아무 의미도, 목적도, 보람도 없는 딴짓은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뽁뽁이 터뜨리기는 준비된 뽁뽁이가 모자랄 정도로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빅데이터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요즘은 쏟아지는 정보가 많아도 너무 많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정보를 받아들이며 보낸다. 지하철에 앉아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너도 나도 5인치 내외의 화면을 통해 열심히 시청각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인지 처리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갈되기도 하고 과부하가 걸리기도 한다. 인지 자원 부족으로 겪게 되는 피로감은 만만치 않다. 점점 깊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자극적이지 않은 콘텐츠들이 유행하는 것이다. 윤 식당, 삼시세끼 등 관찰 예능, 한강에서 열리는 멍 때리기 대회, 무자극콘텐츠연구소, 명상 등이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들은 우리를 진정으로 쉬게 한다. 뽁뽁이 터뜨리기는 아무 생각 없이 향유할 수 있는 무자극의 끝판 왕이다.


무자극 콘텐츠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뽁뽁이는 소유하기보다 그저 존재하는 대상이며, 수단이기보다는 목적으로 대해진다. 특별한 인지 자원이 필요하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콘텐츠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소비주의에 매료되어 있다. 사물은 언제나 목적이기보다는 수단이다. 당신은 주변 친구들을 목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누구나 쉽게 타인을 소유하려 한다.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는 점점 외로워지는 것일 수 있다. 외로워진 우리는 점점 자극적인 콘텐츠를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밀려드는 정보량에 이내 피로해지고 만다. 이런 악순환이 시작되었다면, 뽁뽁이가 탈출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뽁뽁이의 존재가치와 무목적은 칸트가 제시하는 타인을 대하는 자세와 닮아있다. 심지어 뽁뽁이의 무자극과 무념무상은 인지 자원을 착취당한 우리에게 휴식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 문단을 읽고 뽁뽁이를 사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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