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용 에어캡의 쓸모
택배가 왔다. 익숙한 마른 감촉의 상자가 손에 들려진다. 커터칼이 몇 번 스치고 나니, 상자는 마치 봉인된 적 없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꼼꼼하게 상품을 보호하고 있는 에어캡을 아무렇게나 벗겨낸 후 옆으로 치운다. 드디어 모니터 화면에서 내 손으로 옮겨온 상품을 이리저리 만져본다. 그러나 잠시 뒤 손에 들려있는 것은 아무렇게나 옆으로 밀쳐둔 에어캡, 일명 뽁뽁이다.
상품을 손에 넣었다는 뿌듯함이 가라앉은 후에는, 멍하니 앉아 뽁뽁이를 터뜨리곤 한다. 상품은 택배의 목적이었고, 뽁뽁이는 제품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목적이었던 상품은 '소유'라는 목적을 달성시키며 성취감을 주었다. 수단이었던 뽁뽁이는 역할을 다 하자 자연스럽게 일상의 '존재'로 녹아들었다.
독일의 정신분석가이자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무엇을 직접 소유하는 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혹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를 논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소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 공허함이다.
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꽃을 꺾어 소유하는 것은 잠시간 만족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꽃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관조할 수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 있다. 이는 꽃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적이다. 존재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은 삶을 소유의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삶 역시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죽음은 내 삶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자유롭다. 소유가 우선인 사람은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게 되지만, 존재가 우선인 사람은 삶의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통찰을 한 바 있다. 도가의 중심인물인 노자는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며, 부유하다고 행복한 것 역시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소유한 것과는 관계없이,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며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물에는 목적이 없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소유하는 것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법정스님도 저서 「무소유」를 통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라는 설명을 통해, 소유에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경각심을 느낄 수 있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포장지 속 '상품'에만 작용한다. 처음부터 상품은 소유하기 위해 구매한 것이다. 그러나 뽁뽁이는 그 과정에 존재했을 뿐이다. 소유가 주는 만족은 점점 옅어진다. 포장을 뜯고, 이리저리 만져보고, 설명서를 읽고, 그 물건의 사용처가 될 곳에 가져다 둔다. 그렇게 상품은 일상의 존재로 녹아든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뽁뽁이는 뜻밖의 즐거움이 된다. 우리는 그저 뽁뽁이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뽁뽁이를 터뜨린다. 이것은 존재의 측면이다. 상품이 주는 일시적인 소유의 만족에 취해 뽁뽁이를 버리는 사람은, 뽁뽁이의 존재가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한낱 완충제에 불과했던 뽁뽁이는, 이제 우리에게 소유와 존재에 대한 통찰까지 주고 있다.
현대사회의 소비는 단순히 상품을 가지기 위한 것 이상으로, 문화적 삶의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소비주의는 소비를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것으로 본다. 소비의 진정한 의미는 상품의 사용가치 이외에도 기호와 상징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500원짜리 볼펜을 놔두고 굳이 400,000원짜리 만년필을 구매하는 것은, 단순히 '필기하기 편하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가생활 같은 무형의 것도 상품화될 수 있으며, 대중은 소비를 통해 끊임없이 욕구를 충족하고, 만족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계속된 소비의 욕구는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 소비는 결국 가치와 상징을 '소유'하고자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비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상품은 목적이 아니다. 상품은 수단이며 소비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심지어 구매 대상이 아니었던 뽁뽁이는 더더욱 소비의 목적이 되기 어렵다. 뽁뽁이는 안전한 배송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때의 뽁뽁이는 우리의 만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상품을 안전하게 보호했는가, 하지 못했는가의 측면만 있을 뿐이다. 뽁뽁이를 터뜨리는 행위 역시 뚜렷한 목적이 있는 행위가 아니다. '뽁뽁이는 만족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뽁뽁이를 터뜨리며 느끼는 만족감이 구매의 대상이 될 만큼 강렬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만족감만을 위해 뽁뽁이를 구매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뽁뽁이를 터뜨리는 행위는 알 수 없는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 기이한 과정에서, 뽁뽁이를 터뜨리는 것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터뜨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뽁뽁이는 방금까지 상품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목적이 되었다. 반면 택배의 목적이었던 상품은, 이제 상품을 주문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새로 주문한 탁상시계는 시간을 알기 위한 수단이 되는 식이다. 중독증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상품을 받는 행위'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뽁뽁이는 목적과 수단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꽤나 역설적인 사물이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뽁뽁이로 할 수 있는 거창한 헛소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