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획자 에딧쓴 Aug 23. 2021

소주 한 잔과 지식의 저주

소주병을 통해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주병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일반 상식에 의해서, 혹은 관찰에 의해서 소주병이 초록색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지각하는 소주병의 초록색과 내가 지각하는 초록색은 다른 색일 것이다.


오랜만에 꺼내보는 파검드레스.


당신은 위 드레스가 무슨 색으로 보이는가? 나는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저것이 어떻게 흰색-금색 조합이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눈에는 명백히 파랑-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흰색-금색 드레스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 반대일 것이다. 그래서 한 때 파검드레스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같은 사진을 보더라도 뇌에서 지각하는 색의 보정값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다.


여자친구의 틴트 색상을 모두 같은 색으로 느끼는 남자친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여성이 색상 구분에서는 남성보다 민감한 경향이 있다. 무지개는 엄밀히 따지면 207가지 색이다. 그러나 문화권마다 5가지, 7가지 색으로 구분하며, 실제로 그렇게 인식한다. 이러한 차이는 색을 지각하는 세포에서, 색을 인식하는 뇌의 처리과정에서, 문화적으로 학습한 내용의 차이에서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한다.


이러한 차이가 색 구분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에서는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이누이트는 '내리는 눈', '녹기 시작한 눈', '단단하게 뭉쳐진 눈' 등 눈에 대한 어휘를 다양하게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눈이라는 한 단어만을 가지고 있는 문화권의 사람과 비교했을 때, 눈에 대한 인식이 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색을 밝음-어둠이라는 두 가지로 규정하는 문화권에서는 무지개 색을 두 가지로 경험한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문화에 따라, 신체적인 작용에 따라 각자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보편적인 세상은 없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주관적인 세상만을 가진다고 했다.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아온 개발자 A와 평생을 자연 속에서 살아온 원시부족 청년 B는 동시대에서도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꼭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아니어도 그렇다. 재벌가에서 자란 아이와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의 세상은 다르며, 당장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세상도 별개로 존재할 것이다. 같은 술 병을 두고 마주 앉은 친구 둘이 지각하는 초록색이 각자 다른 것처럼.


플라톤은 본질은 이데아에만 존재하며, 세상은 그것의 사본일 뿐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에서는 이것을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고 표현했다. 이들에게 실재는 인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조금 어려워 보이지만, 다시 소주병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것은 '소주병의 고유한 초록색은 존재하는가?'라는 이야기로 치환될 수 있다. 같은 소주병이지만 모두 다른 색으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소주병 고유의 초록색은 인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마주 앉은 과장님과 장그래가 인식하는 소주병의 색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초록색이라고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색을 동일하게 인식한다고 착각하지만, 이것은 사회적인 약속일뿐이다. 색이라는 것은 빛의 파장에 따른 연속적인 스펙트럼에서 일정 구간을 '무슨 색'으로 규정하기로 한 것이다. 나아가, 명확한 소통을 위해 색상값을 지정하기도 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색상값을 지정해주지 않으면 사람마다 다른 색을 사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임의로 나누었을 뿐, 색은 연속선상에 있다.


소주병 고유의 초록색은 인식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했지만, 소주병을 생산할 때 사용하는 색상값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통을 위해 연속적인 세상을 임의로 나눈 구획이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공장 생산을 위한 소주병 색의 고유값이 아니라, '너와 내가 보고 있는 소주병의 고유한 색이 존재하며, 내가 보는 초록색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착각이다. 여기서부터 지식의 저주가 시작된다.


내가 아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라는 착각. 그것이 지식의 저주다. 지식의 저주와 관련된 유명한 실험으로는 1990년 엘리자베스 뉴턴의 Tapper and Listener 실험이 있다. Tapper(두드리는 자)는 누구나 알법한 유명한 노래를 듣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리듬을 만든다. Listener는 그것을 듣고 Tapper가 듣고 있는 곡이 무엇인지 맞추는 간단한 실험이다. 재미있는 점은 Tapper가 예상한 정답률(50%)보다 실제 정답률(2.5%)이 월등히 낮았다는 것이다. 나의 기준에서 인식하고 있는 소주병의 초록색을 당신도 동일하게 인식할 것이라는 착각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일종의 인지 편향이며, 뇌에서 일어나는 자동적인 과정이다. '편향'이라고 해서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편향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소통에 문제를 야기하지만, 빠른 판단과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인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어 과부하를 막아주기도 한다. 소주병의 색을 말하기 위해 '색상 코드 #B7F0B1~#47C83E 사이에 있는 그 색'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도 같은 색을 보고 있다는 착각 덕분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통제하거나 억제할 수 없다.


그러나 도구는 제 용도로 사용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다. 핵융합은 발전소를 통해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빛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인류에게 가장 큰 재앙의 빛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은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편향을 극복하고 싶다면 그 이유는 소통의 문제를 줄이고 싶어서일 것이다. 소통의 문제를 줄이는 것은 편향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편향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 메타인지가 올라간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보는 소주병 색이 진정한 초록색이다.'라는 소모적인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초록색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토론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합의점을 찾아가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위와 같은 논쟁은 연구자들이 연구실에서 대신해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상대방도 나와 같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알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나의 상식이 세상의 상식이라고 생각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차별적인 언어가 탄생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탄생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NPC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가 주인공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각자는 자기 삶의 플레이어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많은 소통의 간격을 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늘도 술병을 마주할 핑계가 생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