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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통의 제안 메일

by 유수진

브런치에는 '제안하기'라는 기능이 있다. 기업이나 기관에서 작가에게 강연, 기고 등 협업을 제안할 수 있는 창구인데, 나도 종종 이 기능을 통해 제안을 받아왔다. 지금까지 얼마나 제안을 받았는지 궁금해 메일함으로 들어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2019년 10월 22일에 받은 제안이 첫 제안이었다. '작가님께 새로운 제안이 도착하였습니다!'라는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왜 나한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브런치를 시작한 지 2년이 된 무렵이었고, 내가 글을 쓰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때였다.


첫 제안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받은 제안 메일이 총 25통. 이중에 실제로 업무 협업으로 이어진 건은 4건, 현재 논의가 오가고 있는 건은 1건이 있다. 그러니까 총 제안 메일 중 20%가 실제 성과로 이루어진 셈이다.



대다수는 '제안'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편지성 글이거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결과 맞지 않았던 경우였지만, 실제로 이어진 협업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동네 작은 슈퍼에서 대형 마트 격으로 확장해주었다.


특히 '강의'가 그랬다. 글쓰기 '모임'은 진행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강의' 경험은 없던 나에게, 한 평생학습관에서 강의 제안을 해주셨다. 수십 명 앞에서 강의를 한다고 했다면 부담감에 몸서리를 쳤겠지만(그래도 안 하진 않았겠지만), 다행히도 비공개 유튜브 채널로 진행되는 강의라 카메라 앞에서 녹화를 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은 만큼 부담도 되었지만 그런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 감사하고 또 이 기회가 너무도 귀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나는 글쓰기 강의도 가능한 작가가 되었다.


일의 확장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요즘,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이길보라 감독의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입술 대신 손과 표정으로 말하는 부모님을 따라 몸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가봤고, 먹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먹어보며 세상을 배웠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에는 갑자기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를 만들어 '로드스쿨러'의 삶을 살았다.


그녀가 만든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가 일본 영화제에 초청되어 처음으로 외국 영화제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감독을 보며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리고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에 지원해 어렵게 합격하지만,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닥치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면 어차피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우니 애초에 아카데미에 지원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길보라는 달랐다. 그녀는 페이스북과 매달 쓰고 있던 신문 칼럼에 '네덜란드 유학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을 모집합니다'라고 써서 게시글을 올렸다. 왜 여기에서 돈을 모집하냐며 욕을 먹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59명의 후원자로부터 1천만 원의 장학금을 모으게 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내 경험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는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방법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듯 툭 하고 나온다. 나는 그것이 '경험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는 것을 망설이는 그녀에게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가라"며, 어떤 경험이든 괜찮다고 말해준 부모님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경험을 늘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확장된다. 내가 하는 일과 크게 관련이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시간이 흘러 언젠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툭 하고 그 경험 값을 내민다. 이길보라 감독이 쓴 책의 제목처럼, 우리의 일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라 나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제안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얼마 전, 강의 제안을 보내주신 곳에 어떻게 나를 아시게 되었냐고 여쭤보니 내가 딱 하루 동안 오픈했다가 개인 사정으로 닫은 클래스를 보고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문을 열어두되,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유학길에 오른 이길보라 감독처럼 내가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길도 부지런히 뚫어나가야 할 것이다. 괜찮다, 그 어떤 예기치 못한 모든 경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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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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