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둘째다. 막내로 태어났고 위로는 세 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이든 무엇이든 언니에게 많은 것을 빼앗겼고, 언니가 무서워서 별로 대들지도 못했다. 집안에서는 언니가 무언가를 하면 믿음직스러워하는 분위기였고, 내가 무언가를 하면 불안해했다. 몇 만 원을 들고 나갈 있을 일이 있으면 언니의 주머니에 넣어야 했고, 집에 있는 기계가 고장 나면 언니가 AS 센터에 전화해 고쳐야 했다.
언니나 오빠가 있는 다른 친구들은 오히려 막내의 힘을 발휘해 언니와 오빠 것을 빼앗기도 하던데, 나는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춘기가 극에 달했던 중학생 때도 마치 언니의 시중을 들듯 언니한테 모든 것을 맞추었는데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내게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었다. 사실 나도 그때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언니를 싫어할 때도 있었지만, 깊은 속 내면에서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첫째가 되고 싶진 않거든.'
그 어린 내게도, 첫째로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첫째로서 짊어지어야 할 책임이 더 크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나야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굴러다녀도 상관이 없지만 큰돈을 주머니에 넣고 있어도 될 만큼 부모의 신임을 얻은 언니는 그만큼 돈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얻었을 테니까. 그 돈을 언니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한들 나는 차라리 이리저리 뛰어다닐 자유를 얻는 쪽이 더 행복했다.
1999년에 개봉한 영화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세 남매 중 둘째를 잃어버린 한 가족의 이야기다. 엄마 '베스'는 동창회에 갔다가 어린 둘째를 첫째에게 맡긴 후 잠시 자리를 비우는데, 돌아온 자리에 둘째는 사라지고 첫째만 남아 있다. 베스는 자신 때문에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남편과의 사이도 점점 안 좋아진다. 두 사람의 다툼이 격해지자 첫째는 갓난 아기인 셋째를 일부러 울려서 두 사람의 다툼이 멈추도록 한다.
9년 후, 우연히 둘째를 찾게 되지만 이미 다른 가족의 품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둘째는 진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서도 혼란을 느낀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 형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나무 상자에 갇혀버린 사고를 기억해 내는데, 둘째는 그 당시 자신이 '무섭지 않았다'라는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형이 자신을 찾으러 올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무섭지 않았다고.
동창회에서 첫째는 일부러 둘째의 손을 놓았다. 두 동생이 생긴 후로, 부모는 첫째에게 관심을 많이 쏟지 못했고, 그래서 유독 첫째의 표정이 어둡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둘째를 잃어버린 후에는 슬픔에 빠진 나머지, 홀로 부모의 다투는 소리를 참아내야 했던 첫째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고,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고통만큼 동생을 잃어버린 형의 고통도 크다는 사실을 알아주지 못했다. 서러웠던 어린 첫째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동생의 손을 놓는 일뿐이었다.
"첫째답다"
듬직하고 믿음직하게 동생들을 챙기는 장녀, 장남에게 하는 말. 나의 어렸을 때와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여서인지 나는 영화 속의 이 첫째가 첫째 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참으로 안쓰럽고 대견했다. 스스로 선택한 순서도 아닌데 첫째가 첫째답다는 건 무지 애쓰고 있다는 뜻일 테니, 가끔은 첫째 답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면 어떨는지. 첫째에게 눌려 살았지만 첫째의 덕도 많이 본 둘째가 제안해 본다.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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