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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by 유수진
CEO가 된 직장 상사

지연님을 처음 만난 건 2016년 1월, 면접 자리에서였다. 그녀는 내 면접관 중 한 명이었고, 입사한 후로는 내 직장 상사가 되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건 그녀와 함께 일한 시간이 겨우 1년 남짓이었다는 것. 정말 많은 프로젝트를 함께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녀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닐 정도로 그녀를 좋아했다. ‘일을 잘한다’는 말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었고, 후배인 나에게 시켜도 될 궂은일을 늘 본인이 맡아서 함으로써 '직장 상사'에 대해 갖고 있던 내 편견을 모두 깨뜨려 주었다. 사람들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정명석' 캐릭터가 판타지에나 존재하는 인물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캐릭터였기에 그녀를 만난 후로 그녀는 내 책이나 글에 자주 등장했다.


함께 일한 지 1년 만에 그녀가 퇴사를 하는 날에도 아쉬울지언정 크게 슬프지 않았던 건 회사 밖에서도 우리의 인연이 쭉 이어질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창업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창업이라는 것이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 일인지 잘 몰랐기에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달라고 졸랐고, 몇 달간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다 그녀는 팝피즈 사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24시간 언제든 연락이 닿는 사람


그녀가 미국으로 간 뒤, 나는 '산호세 시간'을 자주 검색했다.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일까, 혹시 바쁘시면 어쩌지 걱정이 되면서도 결국 오래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나 역시 그녀가 퇴사한 후 이직을 했기에 이직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기도 했고, 힘든 일이 닥쳤을 때에는 시간에 상관없이 전화해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기도 했다.


그런 내가 귀찮을 만도 할 텐데 그녀는 언제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3시든, 4시든 언제나 연락이 닿았고, 미팅이 있거나 바쁜 일이 있었을 때에는 늦게 답장한 것이 당연한 데도 미안하게 여겼다. 16시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오래도록 연락이 닿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건 그녀가 잠을 푹 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의 사업이 신문에 소개되고, 웹사이트는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CEO가 된 그녀는 일에 있어서 점점 더 강철 같은 사람이 되어 갔지만, 나에겐 여전히 직장 상사 이상의 소울 메이트 같은 사람이었다.


수진을 우리 회사에 모시고 싶어


3년의 시간이 흐른 동안 나는 그녀와 함께 일했던 회사 외에 두 곳의 회사를 더 거쳤고, 그녀는 미국에서 사업을 더 확장시켜 나갔다. 그녀는 가끔씩 내게 '언젠가 수진을 우리 회사에 모시고 싶어'라고 말했다. 나를 애정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고,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주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2022년 3월, 등산을 하던 중 그녀에게 메시지를 받고도 크게 현실적인 실감이 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수진을 정식으로 COO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우리가 앞으로 해나갈 일들을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있지만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스스로 계획을 만들고, 고되면서도 즐거움이 가득한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것.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보통의 회사 생활과는 다를, 완전히 색다른 일의 방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할 여행이 기대됐고, 이제는 '회사'가 아닌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졌다.



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그녀와 함께 한 지난 상반기는 미친 듯이 바빴다. 솔직히 스트레스 강도도 높았다. 거의 잠을 자지 않는 그녀에 비하면 내 일의 강도는 우스운 수준이겠지만 그런 그녀를 옆에서 따라가고 적응하는 데에도 내게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옛 직장 상사'라는 아름답고도 그저 편한 사이가 아니라 전쟁 같은(?) 여행을 함께 할 전우이자 CEO 였다. 내 딴에는 그런 변화 앞에서 혼란을 느끼기도 했고 동시에 이런 사람과 가까이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녀의 업무 스타일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켰다.


"수진, 7월에 미국 가자!"


그녀는 새벽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총알택시 같다.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 속도감이 스릴 있다. 그녀와 함께 하면 눈 깜짝할 새에 어딘가에 도착해 있었고, 또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팝피즈와 관련해 콘퍼런스에 참석해야 하는 그녀는, 7월에 출장 겸 여행을 함께 떠나자고 했다. 코로나 이전에도 해외여행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미국 여행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는데, 나는 어느새 또 그녀와 함께 비행기에 올라타 있었다.


CEO가 된 직장 상사와 함께 한 14일 간 미국 여행의 시작은 '결항'이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서 202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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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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