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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가는 김에 시애틀에서 하루 묵기

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2)

by 유수진

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1편 먼저 읽기


'하는 김에'의 대가


지연님은 '하는 김에'의 대가다. 강남에 미팅을 하러 갈 일이 있으면 간 김에 근처에 만날 사람들을 다 만나고 오고, 단순 업무 처리를 하면서 드라마를 보거나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는 가끔 그녀가 하루를 48시간 사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데, 같은 24시간을 살아도 남다른 생산력을 발휘하는 건 바로 이 '하는 김에'에서 나온 힘이었다. 이번 미국 여행도 마찬가지다. 이번 미국 여행은 우리가 한국에서 펼칠 사업의 연장선에 있다. 처음엔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날 외에는 온전히 여행을 즐기기로 계획했지만 사업에 대한 구상이 구체화될수록 미국 방문을 단순히 여행으로 그칠 수는 없었다.


지연님은 2017년, 미국에서 팝피즈라는 코딩 교육 회사를 창업했다. 미국 8,000여 개 학교, 4만여 명의 학생들이 팝피즈를 통해 코딩을 배운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 메타버스 플랫폼 로블록스와 커리큘럼 파트너를 맺어 교육 펀드를 받기도 했다. 총알택시 같은 그녀 다운 속도로 팝피즈가 성장해나가고 있는 동시에, 그녀는 한국에서 또 다른 교육 사업을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나와 같이 말이다.


영어 교육 사업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지만, 그녀가 정말 실현해버릴 것 같은 기세로 말하자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레드오션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영어 교육 시장은 이미 불바다인 데다 그녀와 달리 내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어금니에 낀 이물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문제'라고 보는 대신 '기회'라고 보았다. 그만큼 큰 시장이니 분명히 우리가 들어갈 '틈'이 있을 것이고, 내가 영어 실력이 유창하진 않지만 평생을 영어 공부에 매진할 만큼 영어 공부에 대한 관심과 의욕은 넘치니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본 것이다. 그녀의 설득에 나도 흥미가 당겼다.


삐걱거리지 않으면 여행이 아니지


시카고로 가기 전 시애틀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시애틀에서 7시간 동안 대기를 해야 했는데, 장시간 동안 못 씻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드라이 샴푸까지 미리 구매했으나 용량을 체크하지 못해 공항에서 반입금지 물건으로 뺏기고 말았다. 찝찝한 상태로 꾸역꾸역 7시간을 버텨내고 환승 비행기에 올라타기 불과 15분 전, 공항에서 생각지 못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델타 항공을 이용하는 고객님들께 알려드립니다. 5시에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가 결항되어..."


해당 비행기에 탑승 예정이었던 대략 30여 명의 사람들이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항공사 데스크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최근 비행기 결항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곧 나는 한국에선 쉽게 보지 못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1명의 고객당 상담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 결항이 되었다면 다음 비행기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지,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한다면 호텔은 어디에 묵어야 하는지, 식당 바우처를 준다면 몇 개를 받아야 하는지만 탁. 탁. 탁.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내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분통이 터지지도 않는지 이 상황을 황당해하는 서로의 표정을 카메라로 찍으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던 한 여성이 혼잣말로 푸념을 늘어놓지 않았다면 정말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서운해질 뻔했다.


'지금 우리 같이 분통 터지는 상황에 있는 거 맞죠? 예?'

시애틀 공항에서 결항 소식을 듣고 무한 대기중

미국에서 오래 거주한 지연님에게는 이런 일 정도야 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 역시 결항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고 했다. 또한 시카고에 도착해서 컨퍼런스를 준비할 예정이었던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시애틀에서의 하루는 더더욱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우리는 델타항공에서 제공한 식당 바우처로 공항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녹초가 된 몸으로 근처 호텔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호텔 도착하면 침대에 눕는 게 국룰 아닌가요?


배낭 가방 안에 담아온 여벌의 속옷과 화장품이 없었다면 아마 울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징징거릴 때, 여벌의 속옷 따위 없는 지연님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장시간의 비행과 7시간의 대기, 그리고 갑작스러운 결항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겹친 상황에서도 호텔 침대가 아닌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부터 펼치는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늘 해오던 습관처럼, 그녀에겐 그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녀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 '쉬엄쉬엄 하세요'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번 미국 여행이 평생 처음 해보는 여행이라는 말을 듣고도 정말 많이 놀랐다. 하지만 그녀를 말릴 수 없는 건, 그녀가 일에 중독되고도 남을 만큼 진심으로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일을 만들어낼 궁리를 하는 건 그녀와 나의 공통점이기도 해서, 나보다 항상 열 발자국 앞에서 열 배 빠르게 일을 만들어내는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 해나갈 일들을 '여행'이라고 표현한 지연님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여행은 즐거운 것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순리를 깨달은 우리 엄마 말처럼 '집 나가면 개고생'인 일이기도 하다. 고작 하루 못 씻는 게 싫어 드라이 샴푸를 사는 나에게 결항이라는 사건은 엄청나게 큰 스트레스이지만, 같은 스트레스를 겪으면서도 지연님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처리한다. 그것이 여행이니까. 안정성이 보장된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삐걱거려도 결국 스스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자유 여행자에겐 골치 아픈 여행도 즐거운 일상이 될 수 있고, 골치 아픈 일상도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다.


다음날 우리는 하루 늦게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끼어들어 앞길을 방해하고, 힘든 상황들이 닥쳐 울고 싶어도, 결국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 앞으로 지연님과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삐걱거리지 않으면 그게 여행인가? 시카고 가는 김에 시애틀에서의 하루도 잘 묵고 갑니다.

항공사에서 제공해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업무 처리중인 지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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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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