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3)
CEO가 된 직장 상사와 14일간의 미국 여행 2편 먼저 읽기
괜찮아, 모를 수도 있지
차라리 처음부터 모른다고 했으면 일이 커지지도 않았을 텐데 왜 끝까지 '모른다'라고 하지 않는 걸까.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들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사회는 언제부턴가 신입에게도 경력을 원했고 패기는 기본이요, 일의 능숙함과 숙련된 눈치도 요구했다. 사회 초년생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한데 말이다. - 유수진, <나답게 쓰는 날들> 중에서
2016년, 얼떨결에 코딩 교육 회사 PR로 입사를 했지만 사실 나는 며칠 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코딩은커녕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내가 코딩 교육 플랫폼을 홍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높은 빌딩과 당당하게 목에 걸 수 있는 사원증에 반해 덜컥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들어왔지만, 미팅에서 쏟아지는 외계어(개발 용어)를 들리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고 회의실을 나올 때면 '이 회사 사람들은 다 천재인가, 나는 그 사이에 낀 깍두기인가'하며 한없이 작아졌다.
그즈음, 지연님을 만났다. 그녀는 나의 상사가 되었고, 나는 그녀와 거의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우리 플랫폼을 사용하는 학교 선생님들을 만나러 다녔고, 여러 분야의 개발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려고 녹음본과 인터뷰이의 대답을 엉망진창으로 받아 쓴 워드 파일을 꺼내자, 지연님은 이미 내 속마음을 다 읽은 듯이 말씀하셨다.
"모르는 부분은 표시해서 나한테 줘! 사실 나도 찾아봐야 아는 것들도 있지만. 하하하하하!"
회사에서 모르는 게 있을 때 물어볼 선배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후배의 입장에서는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면 선배가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질문을 꺼리게 된다. 지연님은 후배가 더 편히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모르는 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었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게 있다는 걸 드러냈다. 덕분에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하는 데 조금씩 거리낌이 없어졌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봐야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퇴사'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고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이 더 늘어갔다.
그녀는 내게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가져다주는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책에 썼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일들
이번 미국 여행의 메인은 시카고에서 열리는 CSTA(Computer Science Teachers Association) 컨퍼런스이다. CSTA는 2004년 미국컴퓨터학회(ACM)에서 설립한 비영리 단체로, 컴퓨터 과학 교사가 주도하여 컴퓨터 과학 교육의 최신 우수사례를 공유하는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지연님은 팝피즈의 CEO로서, 올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메타 등 주요 IT 플레이어들이 참석하는 이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미국에 오면 그녀가 모든 것을 빠삭하게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행기가 결항이 되었을 때에도, 공항에서 우버를 타고 호텔에 갈 때에도, 맛집을 찾을 때에도, 그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상일 거라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2017년, 창업을 위해 미국으로 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그녀가 맛집을 알리가 없었다.
그녀에게도 창업은 평생 처음 해본 일이기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한국이 아닌 땅덩어리도 넓은 미국 아닌가. 창업자로서는 신생아나 다름없는 그녀가 헤쳐야 할 산은 높고도 높았을 것이다. 내가 피곤할까 봐 "수진은 저기 의자에 앉아있어!" 하며 부지런히 컨퍼런스 부스를 준비하는 그녀를 보니 그녀가 미국에서 감당했을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도대체 언제 준비를 해온 건지 모를 팝피즈 브로셔와 굿즈가 비치된 부스를 보니 건너편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부스보다 작지만 훨씬 더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4일간의 컨퍼런스 기간 동안 온라인에서만 만나왔던 고객들과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었던 점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우리는 모든 일을 온라인으로 처리하고 미팅도 화상을 통해 진행을 하다 보니 실제로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적어졌는데, 사람을 직접 대면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가 있다. 팝피즈라는 서비스를 믿고 구매해준 사람들, 그리고 파트너십을 맺은 타사 담당자들과 주먹 악수를 하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그녀는 창업을 결심한 뒤 미국 땅 위를 뛰고, 또 뛰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녀가 캐리어에 담아온 물건 중 가장 커다란 모니터는 전원 선을 가져오지 않아 쓰지 못했다. 부랴부랴 수첩에 받아 적은 몇백 명의 고객 리드는 손글씨로 써서 글자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나는 그녀의 이러한 '완벽하지 않음'이 좋다. 그런 작은 허술함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녀가 만들어가고 있는 일들은 충분히 거대하고 튼튼하다.
무엇보다도 모르는 것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배우고 익혀나가는 역량으로 그의 실력과 태도를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년 차였던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즐겁게 일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을 더 높이 인정해 주고, 조금은 헤매더라도 후배가 더 나은 방법으로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게 도와준 선배들 덕분이었다. - 유수진, <나답게 쓰는 날들> 중에서
사회 초년생에게만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업자에게도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다. 과연 그녀가 미국에 첫발을 뗄 때,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까? 모르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르는 것' 때문에 가능성을 포기하기보다는 누구보다 빨리 배우고 익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노력해야 한다. 만약 6년 전, 나 따위는 IT 회사에 못 다닌다며 울고 불며 퇴사를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준 그녀와의 창업만큼이나 빡센 여행은 컨퍼런스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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