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꾸준히 사랑하기 위한 노력
연인 관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밀당'이라는 단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심리 싸움을 뜻한다. 상대방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한 번쯤 밀어도 주고, 그러다 상대방이 정말로 토라지면 살짝 당겨도 주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같은 것이다. 그런 걸 왜 하냐는 사람도 있고, 불순한 의도가 있거나 정도가 너무 심하지만 않다면 굳이 나쁠 것도 없다는 이도 있다.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만큼 '지들 맘'인 일도 없으니, 내 생각도 후자에 가깝다. 두 사람 모두 줄에 어떠한 힘도 가하지 않아서 어느 쪽으로 밀리거나 당겨지거나 팽팽해지지도 않는다면, 줄은 늘 그 자리에 멈춰있을 것이다. 그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 필요한 것이 바로 '밀당'이라는 기술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밀당'이다. 연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통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타자기 위에 손을 올려놓자마자 신명나게 타자기를 두들기던 날들이 그리워졌다. 타자기 위의 손가락이 통 움직이질 못하는 날들이 쌓여가면서 내 글쓰기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얼마 진도를 빼지도 못한 채 깨작거리며 쓴 글을 몽땅 지워버리기를 수차례, 나는 이것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순간임을 눈치챘다. 내 글쓰기에 밀당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글쓰기에 어떠한 힘도 가하지 않아서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어떠한 글도 쓰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우선 밀기 기술부터 들어가보자.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을 참기 위해 휴대폰을 잠시 멀리 두는 것처럼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척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대신,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 혹은 미술 전시회를 보는 등 다른 분야로 한눈을 팔아본다. 그렇게 한눈을 팔다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든 내 글쓰기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 다음은 당기기 기술로 들어가보자. 상대방의 마음을 확실히 잡아두기 위해 상대방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글쓰기에 쏟을 수 있는 모든 관심과 열정을 쏟아내는 것이다. 다른 작가의 글을 필사해보기도 하고, 전혀 시도해보지 않았던 분야의 글을 써보기도 하며 형식을 가리지 않고 글쓰기에 매달려본다. 그렇게 치열하게 붙잡다보면 알게 된다. 내가 어떤 글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를 말이다.
박홍순의 <생각의 미술관>이라는 책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세계는 결코 완결적일 수 없고, 그 자체가 과정이요, 결코 정지해 있지 않다. 본질은 고정이나 안정이 아니라 변화다. 오직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나 마그리트가 만물의 변화를 특별히 강조한 이유는 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 바로 변화의 이해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은 완강하게 무언가 고정된 상태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습관에 찌든 사고방식에서는 철학적인 문제의식이 싹트기 어렵다.
무엇이든 하나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보면 지루해지고 지나치게 고정되기 일쑤다. 주말에 쇼파에 오래 누워있다보면 화장실 가는 일조차 귀찮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저녁 8시가 돼서야 훌쩍 흘러버린 시간을 깨닫고 놀라며 일어난다. '내 주말이 어디로 갔지?'
새로운 방식을 찾기보단 익숙해진 방식을 고수하고, 더 빠른 길을 찾기보단 늘 가던 길만 고집하다보면 절대 더 나은 방식을, 더 빠른 길을 찾을 수 없다. '밀당'이 상대방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불순한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멈춰있는 연인 관계에 좋은 변화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밀당이든 뭐든 무엇이든 해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멈춰있는 그대로 무관심하게 내팽개쳐둔다면, 언젠가 상대방은 내 곁을 떠나고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글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거나 어떤 글이든 닥치는 대로 써보는 것이 글쓰기를 꾸준히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라면, 나는 글쓰기와 끊임없이 밀당을 할 것이다. 밀든 당기든, 어차피 밀당이라는 것 자체가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